나는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온종일 움직임을 지속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리고 자려고 눕지만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은 움직임을 가져갈 것이다. 잠을 자는 순간에 일정 시간 동안 내 몸 자체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나도 모르게 내 심장은 계속 뛰고 내 피는 내 혈관 속을 계속 돌아다닐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움직임은 고유한 속성이고, 삶이자 생명 그 자체이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행동을 하고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움직임을 좋아하면 움직임이 없는 사물도 마치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다. 영어 사용자는 울타리가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상황을 묘사할 때 ‘The fence runs along the coastline’이라고 말한다. ‘울타리’는 땅에 박혀 있으므로 달리는 동작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영어 문장에서는 ‘run’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달리는 행동은 다리가 있는 생명체가 할 수 있는 활동이지, 무생물인 울타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러한 언어 현상을 ‘가상 이동(fictive motion)’이라고 부른다. 달리는 것이 울타리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달리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는 울타리가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장면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있다. 이때 관찰자는 머리를 천천히 돌리면서 해안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을 스캔하듯이 훑어서 본다. 결국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은 ‘관찰자의 시선’이다. 관찰자의 시선은 한 사람 자체의 시선이므로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다. 이런 점에서 가상 이동은 ‘주관적 이동(subjective motion)’이라고도 부른다.
정적인 물체가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 중에는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막스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 1880~1943)가 1912년에 발견한 가현 운동(apparent movement) 현상이 있다. 가현 운동은 멈추어 있는 여러 시각적 자극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날 때 발생하는 움직임의 시각적 지각을 말한다. 개별적인 시각적 자극 자체는 정적이지만, 가현 운동은 뇌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대한 착시이다. 가현 운동은 시간 순서의 지각, 이동 지각, 시간 경과에 따른 시각적 정보의 통합 등 몇 가지 시각적 처리 메커니즘에 의존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뇌가 움직이지 않는 시각적 자극의 순차적 표현을 기반으로 움직임에 대한 지각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가현 운동은 시각적 지각의 기본적인 측면이며, 애니메이션, 영화, 광고 및 시각 디스플레이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가현 운동의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은 움직임의 환상을 주는 시각적 자극을 만들어내어 보는 사람의 경험을 향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현 운동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의 눈에서 일어나는 잔상 때문이라고 한다. 잔상이란 빛이 우리 눈에 더 이상 제시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그 대상을 여전히 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눈에 입력된 빛이 시각 신경을 흥분시키면 빛이 사라진 후에도 이 신경들은 여전히 잠깐 동안 흥분하고 있다. 그래서 한 물체가 우리 눈에 입력되고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 대상을 잠깐 동안 볼 수 있다. 이 시간 동안 떨어진 위치에서 다른 자극이 우리의 눈에 입력되면 우리는 잔상에 남아 있던 그 물체가 움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가현 운동은 시각적 잔상이라는 생리적 영향에 따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왜 우리 인간은 가상 이동 또는 주관적 이동에서처럼 정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움직임 자체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고 타고난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타고난 특징을 인간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도 오후 4시가 되면 테니스 라켓을 들고 움직임을 행하기 위해 연구실 밖을 나간다. 나 같은 어른보다 움직임을 더 좋아하는 연령대는 어린아이와 청소년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이것은 아이들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움직임을 빼앗고 있다. 교육의 효율성 측면이든 입시 문제이든 우리 학생들은 교육이라는 거대한 대의명분 하에서 움직임을 박탈당하고 있다. 학생들을 교실에 앉아 있게 하면서 움직임을 억제하는 지금의 학교는 움직임을 선호하는 우리 아이들의 고유한 성향에 반하고 있다.
지적인 학습을 잘하는 학생과 신체적 활동을 잘하는 학생은 학교와 우리 사회 및 문화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영어에는 ‘dumb jock’라는 표현이 있다. dumb은 ‘멍청한, 바보 같은’을 뜻하고, jock은 ‘운동을 많이 하는 남자아이’를 뜻한다. 결국 이 말은 ‘운동만 잘하는 돌대가리’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오늘날의 교육에 널리 만연해 있다. 스케이트보드로 멋진 묘기를 부리는 아이와 어려운 미적분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중에서 후자의 아이가 더 지적이고 똑똑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지금의 우리는 움직임을 덜 선호하는 사회를 설계하고 있다.
나에게 이 교육의 구조를 재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난 학생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고 싶다. 오전에만 정규교육을 하고, 오후부터는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책을 더 보고 싶은 학생은 학교에 남아서 그렇게 하면 되고, 운동하고 싶은 아이들은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놀면 되고, 체험 학습이 필요하다면 학교 측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마련해 학생들에게 현장 학습의 기회를 주면 되고, 집안 사정이나 개인적인 경제 관념으로 일을 하고 싶은 학생들은 아르바이트하면 된다. 물론 이런 내 생각은 결국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움직임을 박탈당한 우리 아이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하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움직임의 본질에 관한 탐구는 고대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움직임 또는 이동을 제대로 이해하면 공간과 시간의 본질뿐만 아니라 이 둘의 상호연결성에 관한 질문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기원전 535년경~475년경)는 우주가 끊임없이 이동과 변화를 겪는다는 견해를 제안했다. 플라톤(Plato)은 헤라클레이토스를 인용해 모든 개체는 움직이며, 정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이다. 반면, 파르메니데스(Permanides)(기원전 515년경~450년경)는 세상이 불변하고 파괴할 수 없는 전체로 보고, 이동을 환상적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Zeno)(기원전 490년경~430년경)은 이동 중인 몸이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중간 단계에 도착해야 한다는 근거로 이동의 비(非)존재를 주장하기 위해 독창적인 역설(가령,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과 ‘화살’의 역설)에 제공했다.
이처럼 움직임은 지금에서야 관심을 가진 현상이 아니라 기원전 6세기부터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기본적인 인간과 세상의 현상이다. 움직임은 학습과 인지(또는 사고)에 매우 중심이므로 그 둘은 사실 같은 것이다. 이는 학습이 움직임을 통해 발생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 곧 움직임이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인간은 움직임을 통해 자신과 더 나아가 우리의 상징적 자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복잡한 생각을 이해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철학자 마크 존슨(Mark Johnso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추상적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몸 기반의 감각운동 근원영역에서 추상적인 목표영역으로의 체계적인 사상(mapping)에 의해 정의된다.” 쉽게 말하자면, 복잡한 생각은 움직임을 통해 더 철저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학습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사실은 한 가지 동물 실험을 통해 잘 입증된다. 새끼고양이 두 마리를 생후 몇 주 동안 2인승 회전목마에 함께 묶었다. 한 마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어서 원하는 대로 원을 그리며 걸을 수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반대편 요람에 누워 있어서 걸을 수 있는 다른 새끼고양이의 기분에 따라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 장치에서 두 새끼고양이는 같은 시각적 경험을 보장받았지만, 한 마리에게는 그 시각적 경험이 자신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볼 것이 많았고 시각계에도 아무런 손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인 새끼고양이는 제대로 보는 법을 학습하지 못했다. 이 새끼고양이는 물체를 인식하거나, 방을 돌아다니거나, 심도 있게 보지 못했다.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움직임과 시각을 연결할 기회를 박탈당한 새끼고양이는 세상에서 의미를 보는 법을 결코 학습하지 못했다. 만약 인간의 아기가 움직일 수 없도록 포대기로 폭 싸여 묶여 있다면, 그 아이의 지각 및 인지 발달은 빠르게 엉망이 될 것이다.
뭔가 복잡한 문제가 생겨 생각할 것이 많다고 할 때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해서 뭔가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을 하면서 지금의 문젯거리를 잠시 내려놓고, 몸을 움직이면서 주변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는 이 전략을 ‘몸 움직임’ 전략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잠을 자는 것이다. 인간의 뇌 용량, 특히 사고를 위한 뇌 부위인 전전두피질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 용량이 다 차면 일정 정도 비워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민감한 문제가 생겼는데,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생각과 이성이 작동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잠을 자면 된다. 잠시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개운해져서 맑은 정신으로 문젯거리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나름대로 해결책을 다시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잠을 잘 때는 움직임이 없으므로 움직임의 중요성에 대한 앞선 나의 이야기와 모순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뇌에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휴식을 취할 때 더욱 활성화되고 작동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뇌 영역이 있다. 이는 우리가 휴식 상태에 있거나 특정 작업에 육체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상호 연결된 뇌 영역이다. 이처럼 우리는 쉬지만 뇌는 계속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전략을 ‘뇌 움직임’ 전략이라고 부른다.
학습과 교육의 효율성을 위해, 그리고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우리는 움직임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제도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교육과 업무는 제도권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므로, 움직임을 개인의 층위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제도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없다고 해서, 또는 제도가 내 관심사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로 우린 그 제도권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제도권이 협력하지 않는 교육과 업무에서 우리 모두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리 개인의 차원에서 ‘움직임’을 가져가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