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승리가 결정적인 결과물인 예술계와 체육계에서 ‘무위’는 필수 요소이다. 반드시 훌륭한 예술작품을 창조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오히려 방해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너무 열심히 애쓰지 않으면서 ‘흐름에 맡기고’ 자신의 하는 일에 그저 자발적으로 몰입하라고 추천하는 음악의 대가가 있다. 유명한 재즈 음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1920~1955)는 음악가 지망생들에게 “색소폰을 연주하지 말고 색소폰이 당신을 연주하도록 하라”는 조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색소폰 연주자에게 색소폰을 연주하지 말라고? 어떡하란 말인가? 색소폰이 당신을 연주하게 하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무위는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의식하지 않으며, 그저 자발적으로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또는 ‘나’가 아니다. 나를 두드러지게 전경화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화해야 한다. 이 말은 내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색소폰이 나를 연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개방성’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열려 있어서 색소폰이 나에게 와서 나와 결합하여 나와 색소폰이 한 몸이 되어 연주가 이루어진다. 이런 연주가 ‘무위적 연주’이다.
무대 위에서 혼자 만담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참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관객을 웃겨야 한다. 그 관객도 혼자가 아닌 수많은 관객이다. 유머를 해서 상대를 웃기는 방법 중에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이 있다. 주변 상황이나 사람을 표적으로 유머를 던져 다른 상대를 웃기는 것이다. 하지만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혼자이므로 그런 지형지물을 구할 수가 없다. 과연 그렇다면 이런 코미디언은 어떻게 그 많은 관객을 웃길 수 있을까? 자신이 맡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이다.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내’가 있고 ‘내가 맡은 역할’이 있다. 나를 전경으로 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맡은 역할을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 즉, 만담할 때 나는 없어야 한다. 즉, 나를 의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를 열어 두어 그 역할이 나에게 들어오게 해야 한다. 내가 없어야 한다는 것, 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무아(無我)이다. 영어로는 unselfconsciousness가 된다. selfconsciousness는 ‘자의식’이다. ‘자의식’이 없는 것이 ‘무아’이다. 무아(unselfconsciousness)는 ‘자신을 뽐내지 않음’으로 확장된다. 자신을 뽐내듯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관객의 눈에는 어색함 그 자체이고 웃음이 아닌 비웃음을 유발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뽐내면서 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위는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충실해서 자신을 뽐내는 일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인기 하락으로 가는 지름길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학생 한 명이 질문하러 왔다. 답변해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학생은 내가 유머를 적절히 잘 섞어서 수업을 진행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업에 빠져든다고 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겐 그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난 조금 쑥스럽고 그 칭찬을 계속 듣기 부담스러워 “책에 유머 내용과 위치를 미리 표시해둡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아,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 적시 적소에 유머가 잘 나오는군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난 책에 그런 표시를 한 적이 없다. 만약 내가 그런 표시를 해 두고 그 시점이 와서 유머를 던졌다면 그 유머는 강의실을 100% 썰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상대를 진심으로 웃게 하는 유머, 즉 성공적인 유머는 자발적 유머이지, 내가 개입해 미리 준비한 유머는 아니다. 진정한 유머는 ‘무아적 유머’이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2시간짜리 수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50분 수업 후 10분 쉬는 시간을 가졌다. 복도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데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이 화장실을 가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대뜸 “교수님 수업은 매우 집중이 잘 되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모르고 수업을 듣게 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민망함을 느끼며 나머지 수업을 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해 준 그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고 의식이 되어 수업을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에 설정훈 학생이 내 수업에 대해 극찬을 해 주는 바람에 지금 그 말이 너무 의식이 되어 수업을 끌고 가질 못하겠네요. 그러니 오늘은 수업 여기까지 하고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바로 강의실을 도망가듯 나왔다. 학생들은 당연히 나머지 한 시간을 휴강했으니 좋아하며 함성을 질렀다. 그랬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가 두드러지는 순간, 나 스스로를 의식하는 순간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무위적 수업, 무아적 수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제 운동계로 넘어가 보자. 내가 테니스 선수이고, 지금 한 번도 이긴 적 없는 상대 선수와 시합 중이라고 가정해 보자. 오늘따라 나는 지금 최고의 경기를 하고 있고, 처음으로 그 상대 선수를 막 이기려는 찰나에 마지막 세트를 하고 있다.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나는 승리를 점점 더 뚜렷하게 인식하고 의식한다. 그렇게 하는 순간 마지막에 그 경기에서 역전당하는 일이 생긴다. 승리를 의식하면 긴장하고 지나치게 신중하게 된다. 그냥 스윙하는 것이 아니라 스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내 몸이 뻣뻣해져 스윙이 어색하고 실수가 나온다. 상대 선수는 점수 차를 점점 좁혀 온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그냥 긴장을 풀고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물론 긴장 풀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더 긴장하게 되고, 나의 리드가 사라지고 상대 선수가 승리를 챙기게 된다. 운동선수가 자기 몸을 의식하는 순간, 그 선수의 몸은 굳어지고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이것은 운동에서의 무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