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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민호 May 10. 2024

암기보다는 기억해야

역사책을 읽을 때에는

중학생 아이들과 세계사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다. 중학생 아이들과 세계사 책을 공들여 읽는 이유는 이렇다. 많은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한국사 책을 읽거나 한국사 검증 시험을 준비하거나 역사 논술 수업을 들어 어느 정도 한국사에 대한 지식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세계사는 방대하기도 하고 세계사 능력 검증 시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세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해 함께 인문학 책을 읽고 공부하다 보면 세계사에 대한 이해가 다른 학문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몸소 경험할 수 있다.


예술도 그렇고 철학 책을 읽을 때도 세계사는 필요하고, 경제를 배울 때도 세계사는 필요하다. 케인즈의 수정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대공항 이야기가 나오고 대공항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제1차 세계 대전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세계 문학을 읽을 때는 더 그렇지 않을까? 위대한 게츠비를 읽을 때에도 걸리버 여행기를 읽을 때에도 당시 미국과 영국의 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소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예술과 인문학 그리고 과학과 수학 또한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각각의 학문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극을 연결해 주는 학문이 역사이다.


세계사 책을 읽은 아이들에게도 아쉬운 점이 보인다. 책을 읽을 때 흐름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중요 사건과 인물을 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많이 배우는 것보다,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를 배우고 이해하게 되면 그 하나를 종잣돈 삼아 넓히고 깊게 할 수 있는데, 많이 배웠으나 이해하지 못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책을 처음 읽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면 이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할 70% 정도의 조건은 충족한 셈이다. 하지만 아이들 대부분은 목차를 읽기조차 하지 않는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 역사 시간의 흐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반복해 읽어도 신기하게 하루만 지나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에게 인류 역사의 흐름을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면 질문에 답을 하는 친구들은 초반에는 극히 드물다. 그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1. 아마 너희들 대부분 책을 읽었으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그런데 누군가는 책을 읽으라고 엄마가 책은 사 주었고, 수업 시작 전에 읽어야 하니 읽어야 할 것 같기는 하고... 

3. 그래서 마음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으니 한 10줄 정도 읽은 다음에는 서서히 머릿속에서 딴생각이 나기 시작하고, 옆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스마트폰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환영이 보이고

4. 결국 아주 빠른 동작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한 후, 엄마와 선생님 얼굴을 떠 올리며 다시 책을 집어 들었지만

5. 집중은 안 되고......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6. 첫 번째 줄을 읽은 다음 점프를 해서 스무 번째 줄을 읽고, 그다음 또 점프를 해서 다음 페이지를 읽고

7. 이렇게 책과 책 사이를 점프하는 신공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책을 끝까지 읽는 기적을 발휘하며

8. 마음속으로는 "그래. 그래도 나는 책을 끝까지 다 읽었어. 그러니 책을 사준 엄마와 선생님께 부끄러움이 없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하지만

9. 정말 신기하며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이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신비한 현상을 경험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마치 내가 보지 않은 것과 미래도 예측할 수 있는 신기가 충만한 무당 정도로 여긴다.


비문학은 소설처럼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몰입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관심이 없는 분야라면 읽는 것 자체가 고난이다. 그래서 특히 내가  관심 없는 분야의 비문학 책이라면 글자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나라도 더 하면서 읽어야 한다. 결국, 집중력의 싸움!


아이들 중에 역사나 세계사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드물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세계사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가 부처님의 고행이니, 특별한 노력 없이는 '점프하며 책 읽기'를 할 수밖에 없다. 수업 전,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복해서 흐름을 설명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흐름이 머릿속에 없으면 어차피 빨리 읽어도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고 기억이 나지 않으면 읽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가 의도한 대로 흐름을 설명하는 학생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발표를 하며 눈동자를 위로 치켜뜬다. 입으로 말을 하면서 머릿속에서 무언가 생각하며 추론을 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나온다. 외워서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정면이나 선생님을 응시하며 얘기한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흐름을 외워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오래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세계사만 공부하나? 어떻게  공부할 때마다 그 많은 양의 지식을 외울까?


암기는 짧지만, 기억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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