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된 이후 미국은 전략적 도달 범위와 우위를 이용해 군사적 수단이 무역을 표적으로 삼지 못하는 세계를 구축했다. 세계화는 동맹의 안보협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 피터 자이한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미국 주도의 브레튼우즈 체제 속 평화는 수천 년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매우 독특한 환경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해져 버린 미국이 '세계 경찰 놀이'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성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지금 우리 세상은' 시리즈 시작부터 지금까지 '특수한 현재'와 '익숙한 과거'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다음 단계에 대해 알아볼 차례이다. 특히 한국인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될 '예정된 미래'에 대해서...
빨리빨리!
한국에 온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운다는 말이다. 그만큼 한국인은 '속도감'을 사랑하고, 일을 진행함에 있어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1950년부터 2000년 언저리까지 근 5~60년 간의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 안에는 서구 국가들이 수 백 년에 걸쳐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내전, 강대국 원조, 저임금 노동, 외화 벌이, 가문의 뿌리 찾기 등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졌어야 할 사건들이 5배속 빨리 감기로 정신없이 넘어간다. 서구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주인공 덕수는 10년 단위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원래 한 사회 내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계층이 존재한다. 어린아이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나 중년인 부모나 자식들을 모두 분가시킨 장년층이나 은퇴자들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세대 차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천천히 변화하는 보통의 시대나 국가에서 이러한 차이는 사회가 자연스레 소화한다. 연령대별 관심사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애를 통틀어 겪는 일은 비슷해서 서로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도 압축성장'이라는 격변기를 거친 한국은 조금 사례가 다르다. 산업화, 민주화, X, MZ, 알파 세대별 경험한 것이 판이하게 차이가 나,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최근 만연한 세대 갈등, 지역 갈등, 남녀 갈등 모두 너무 빠른 성장에 따른 수리비 영수증인 셈이다.
“출산율이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 인구는 3세대 안에 현재의 6% 미만으로 떨어질 것. 이 인구는 대부분 60대 이상이 차지할 것이다” - 일론 머스크
세계적인 기업가가 언급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전 세계 '저출산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빨리빨리'를 사랑하는 민족답게 잽싸게 치고 올라가더니 선두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오죽하면 온라인상에서 한국인을 '멸종위기동물'로 지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을까.
물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상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존'이란 측면에서 한국의 사회 변화에 따른 출산율 추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전쟁(6.25)은 인간의 생에 대한 욕구를 가장 높이는 이벤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의지를 불살라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으려 한다. - 1960년 대한민국 출산율 5.95명
*농촌에서 아이들은 사실상 부모의 경제적 필요에 묶인 공짜 노동력이었다. 확대가족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부족을 형성했다. - 1970년 대한민국 출산율 4.53명
*도시로 이주하면서 자녀는 (경제적 측면에서) 정말 값비싼 대화 소재로 전락했다.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할 만한 일이 없다. 그래도 아이들을 입히고 먹여 살려야 했다. - 1980년 대한민국 출산율 2.82명
*여성이 가사와 농사에서 해방되고 대중교육을 받게 되고 스스로 소득을 올리게 되면서, 대가족을 바라는 여성들조차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990년 대한민국 출산율 1.57명
*소득, 위생 수준, 의료기술, 인권의 신장은 '생존'의 초점을 자녀에서 본인에게로 옮겨오게 만든다. 내가 오래 살 수 있고 자녀를 낳았을 경우 발생하는 여러 어려움이 예측가능해지면 '번식을 통한 생존'의 욕구는 자연스레 줄게 된다. - 2010년 대한민국 출산율 1.23명
진짜 문제는 인구 감소가 아니다. 인구구조의 변화다.
그동안 베이비부머 세대는 소득과 자본을 창출하고 세금도 많이 내는 대한민국의 살림꾼이었다. 그들 덕분에 우리나라는 교육과 치안과 의료비와 기간시설과 재난구조 같은 데 드는 비용을 문제없이 감당해 왔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동시에 은퇴하는 시기가 다가왔다는 점이다. 은퇴자들은 체제에 돈을 주입하는 대신 연금과 의료비용의 형태로 돈을 빼내 간다. 지금의 체제는 은퇴자보다 근로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전제로 짜였다. 급격한 저출산이 이어지면 체제 붕괴는 정해진 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쉽지 않다.
몰표를 행사하는 집단인 은퇴자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토로한다. 이로 인해 정부와 정치인들은 점점 더 포퓰리스트의 요구사항에 따라 단기적인 적자재정을 남발하게 되고, 이는 물가를 치솟게 만들 것이다. 빚만 물려받고, 평생 월급을 모아도 집을 살 수 없으며 본인은 받지 못할 연금을 메꾸며 살아야 하는 나라에서 앞으로 아이들은 더 많이 태어날까, 적게 태어날까. 정말 국가개조 수준의 혁신이 없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아기 울음소리는 점점 듣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국 도시의 미래'의 저자 김시덕은 인구를 늘릴 방안으로 3가지를 제시했다.
1)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해야 한다. - 인종적 단일성, 가부장제, 정상 가족을 포기하자.
2) 여성이 살기 좋아야 한다.
3) 비건과 할랄을 제공해야 한다. - 다양한 성향의 외국인을 외국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자.
언제까지고 한민족만 강조한다면 불과 몇 년 만에 대한민국은 노인만 남은 활기 잃은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이민자들이 한국 시민이 되어 한국 사회에 문화적 다양성의 충격을 주기를, 그리하여 한국이 복합적, 다층적 성격을 띤 강한 국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인도에서 바다 건너온 여성이 만나서 가야를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의 가락국기 신화는 미래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언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 김시덕 '한국 도시의 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