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모든 것, 영화와 소설 5. 미저리
이야기의 모든 것, 영화와 소설 5. 스티븐 킹의 '미저리', 롭 라이너의 '미저리'
(이미지와 텍스트에서 같은 이야기의 어떤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는지 알아봅니다.)
이 문서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의 스포일러를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천일야화'에는 불륜을 저지른 왕비에 대한 복수심으로 매일 밤 처녀를 처형하는 '샤흐리야르' 왕이 등장한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관의 딸이었던 '셰에라자드'는 스스로 자청하여 왕비로 들어간다. 왕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면서 매일 밤 흥미진진한 부분에서 이야기를 끊고 다음 날 밤으로 이야기를 넘기는 것을 1001일 동안 반복한다. 왕은 다음이 궁금한 나머지 끝내 '셰에라자드'를 죽이지 못했고, 결국 광기 어린 살육을 멈췄다.
'미저리'에도 '광기에 빠진 왕(극단적인 독자 애니)'과 '셰에라자드(베스트셀러 작가 폴)'가 등장한다.
눈보라 속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애니에게 구출된 폴. 살아났다는 것에 안도한 폴이지만 그가 눈뜬 곳은 애니의 왕국이었다. 사고로 인해 하반신이 망가진 폴은 애니의 도움 없이는 먹지도 마시지도, 심지어 생리적 욕구 해결도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다. 그런 폴에게 애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여왕이자, 폴이 창조한 세계가 진짜라고 믿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에 푹 빠진 독자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를 낚아야(Hook) 한다!
모든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극단적인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가 진짜라고 믿을 정도의. - 셰에라자드 콤플렉스
폴은 '미저리'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로맨스 소설 시리즈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비평가들에게는 늘 혹평을 당하는 데다 그의 팬들은 오직 미저리 시리즈에 대한 것만 궁금해 해, 폴은 완전히 질려버린다. 그래서 미저리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는 것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을 만한 정통 소설을 집필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극성팬을 대변하는 애니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미저리를 원했다. 아니, 미저리만 원했다. 그런 그녀에게 미저리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고 자신이 사랑한 세계와 인물의 창조주였던 폴은 타락한 루시퍼로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분노에 찬 애니에 의해 그의 새 소설은 불태워지고, 미저리를 되살려내라고 강요받는다.
글쓰기는 고통을 유발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태어난다.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영감은 원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머리를 쥐어짜 고민을 해도 몇 시간 동안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기 일쑤다. 그래서 작가들은 글쓰기를 방해하는 나쁜 습관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는 외딴곳에 칩거하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집필해 보기도 하고, 자신만의 마감을 설정해 스스로를 압박하곤 한다. 싫든 좋든 마감일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다.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대부분 작가들이 알고 있다. 만약 공개되지 못한 채 작업실에 머물게 되면 이야기는 썩기 시작하고, 질이 떨어지며, 소소한 트릭과 복선들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폴에게도 뮤즈가 찾아왔다. 고통의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 매우 급작스럽고 간편하게 작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사기 캐릭터나 연출 요소
고통의 뮤즈 애니는 폴이 최고의 작품을 집필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돕는다.
인기작이 아닌 다른 걸 쓸려고 앙탈을 부리면 굶기거나 진통제를 주지 않은 채 방치하여 고통스럽게 하거나, 새롭게 도전한 작품을 졸작이라며 불에 태워버린다. 대충 써 오면 질책과 살해 협박으로 돌려보내기도 하고, 글쓰기에 몰두하지 않고 한눈을 팔면, 발 한쪽을 해머로 날리거나 엄지손가락을 잘라 글쓰기 외에 다른 걸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하루에 4페이지가 생산할 수 있는 최대치라 여겼던 폴이 애니의 격려 속에 평균적으로 하루에 12페이지를 쓰게 된다. 7장은 아침 시간에, 5장은 저녁 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하루 종일 오직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 설정 때문이었다.
나도 정말 그 이야기의 끝을 알고 싶어.
그게 내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유일한 거야. - 애니 윌크스
공자가 말하길, 한 움큼의 옥수수를 얻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거름을 퍼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생존은 애니가 쓰라고 강요하는 것, 미저리에 달려있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스토리 라인과 결말을 완성하였다. 이제는 그가 반격할 차례다.
애니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미저리'를 통해 찾고 있던 폴은 애니에게 새로 쓴 챕터를 하나씩만 공개하며 감질나게 만들었고 생명을 위협하면서까지 한 번에 다 보고 싶어 하는 애니를 구슬려 '결정정인 펀치라인'을 남겨두었다.
만약 이야기의 끝이 알고 싶어 죽음조차 미뤘던 애니가 그 '결정적 장면'을 볼 수 없게 되면 어떤 마음일까?
그녀 눈앞에서 '미저리의 귀환'을 불태우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폴은 애니에게 배운 그대로 그녀에게 복수하고 그녀를 제거한다.
작가에게 최고의 고통은 무엇일까?
마감? 더 나은 작품에 대한 압박감? 만성 치질과 허리, 손목 통증?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매력 없이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마치 '그 후로 오랫동안' 같은 것. 아무도 쓰지 않는 구질구질한 후일담.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건 사랑의 절정에서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훅 잡아끄는 이야기의 힘을 얻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작가들이 고통의 뮤즈에게 '손모가지'를 하나씩 내걸고 분투하고 있다.
행운을 빈다!
글 쓸 시간이야, 글 쓸 시간이야, 폴!
'미저리' 이야기의 2가지 버전
롭 라이너의 영화 '미저리(1990)' - 미저리 이야기의 순한 맛(?). 캐시 베이츠의 연기를 본 사람이라면 순한 맛이라는 게 의아할 듯.(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짧은 러닝타임을 고려해 공포에 가까운 스릴러에 집중하였다. 미저리로 유명해져 여주인공 이름을 '미저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녀의 이름은 '애니 윌크스'이며, 그녀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미저리'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 '미저리(1987)' - 미저리 이야기의 매운맛. 애니는 폴의 다리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하고 탈출하지 못하게 도끼로 왼쪽 발목을 날려버린 후 잘린 단면은 산소용접기로 지져버린다. 나중에는 폴이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며 왼쪽 엄지손가락도 잘라버린다. 영화에선 망치로 부러뜨리는 것으로 순화(?)되었다. 게다가 실종된 폴을 찾다 애니의 집 근처까지 온 보안관은 작대기로 몇 번 찔러 쓰러뜨린 다음 잔디깎이로 갈아버린다. 영화에서는 산탄총으로 날려버리는 것으로 덜 잔인하게(?) 바꿨다.
그로테스크하게 잔인한 부분을 제외하면 작가가 가지는 창작의 고통을 우화적으로 잘 풀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