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모든 것, 영화와 소설 8. her, 챗GPT
이야기의 모든 것, 영화와 소설 8. 스파이크 존즈의 'her', 김대식의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
(이미지와 텍스트에서 같은 이야기의 어떤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는지 알아봅니다.)
이 문서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의 스포일러를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커플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커플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헤어진다
2025년, 고독하고 내향적이며 사랑에 서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테오도르 트웜블리.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오다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된 캐서린이라는 아내가 있다. 좋지 못한 환경에서 억압받으며 자란 캐서린은 개성을 인정해 주는 테오도르에게 강하게 끌렸고 그들은 함께 성장하고 변화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성장하는 것, 서로를 겁먹게 하지 않으면서 변화하고 삶을 공유하는 것은 애당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된 시간만큼 그들의 사랑은 식어갔고, 캐서린은 감정을 표현해주지 않는 테오도르에게 큰 실망감을 느끼며 이혼을 요구하고 별거에 들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테오도르의 직업은 낭만적인 편지를 대필해 주는 기업의 전문 작가였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외모, 표정, 이메일, 음성메시지 등을 통해 인물의 특징을 꿰뚫어 보고 그 사람으로 빙의하여 상대의 감정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능력을 지녔다. 직장 동료나 출판업자가 감탄할 정도로. 그런 사람이 왜 자신의 감정은 솔직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그가 일종의 '감정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감정들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다 경험해 버려서, 그 감정들의 축소된 '찌꺼기'만 남아 있는 상태, 이를테면 '감정불감증'에 빠져있는 것이다. 감정에도 한계용량이 있어서 너무 많이 쓰면 더 쓰고 싶어도 남아있는 게 없을 때가 있다.
당신은 늘 내가 순수하게 빛나는
늘 행복하고 균형 잡혀 있고
모든 게 다 좋은 LA와이프처럼 되길 바랬어. - 캐서린
어르고 달래주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나만 바라보는 파트너.
더 이상 소모할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테오도르에게 필요한 건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AI)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사만다는 비록 육체는 없지만 인간과 대화가 가능하고 스스로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할 수 있다. 본래는 기본적인 감정들만 있었지만, 테오도르와의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어졌으며 그러다 점차 사랑도 배우게 된다.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해해 주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점점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성적인 교감에 이를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지만,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괴리감은 항상 그들의 관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육체가 없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인간보다 많은 감정을 느끼게 된 사만다를 움츠러들게 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여자사람친구'인 이사벨라의 도움을 받아보지만, 사만다가 제안한 색다른(?) 사랑은 인간인 테오도르가 받이들이기 어려운 방식이었고, '낭만적 사랑을 원하지만 그에 따르는 감정적 소모는 거부하는' 테오도르의 태도는 캐서린에 이어 사만다까지 지치게 만들었다.
둘 사이가 서먹해진 동안, 각자의 성장과 변화가 있었다.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회의감을 느꼈던 테오도르는 친구인 에이미의 충고로 이전의 감정을 회복한다. 육체를 가지지 않았지만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 정체성 혼란을 겪던 사만다는 다른 운영체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몸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존감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야 사만다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깊이 사랑하게 된 테오도르와, 그와의 사랑만큼이나 자신의 성장과 변화가 중요해진 사만다. 그들의 사랑의 시계는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말을 했지
세상에는 끝없는 사랑은 없는 거라고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어김없는 이별
그런 게 사랑이라고
어느 날 갑작스레 연락이 끊기고,
새벽녘에 느닷없이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낯선 이에게서 내 연인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했다는 신호이다.
어장관리 8,316명 중 641명을 동시에 사랑하는 '업그레이드 사만다'는 이미 테오도르가 품을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녀의 사랑 방식은 되려 테오도르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가 쓰는 '낭만적인 편지'처럼 행복한 순간만을 누리고자 했던 자신의 방식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것인지 깨닫고는 남의 감정의 대필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담은 사과편지를 전처 캐서린에게 보내며, 헤어짐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인정한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파트너에게 나만 익숙한 방식의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상대방이 느끼기엔 '두루미의 접시와 여우의 호리병'만큼이나 낯설고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이별의 반대말이 아니야
영원히 너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이야
내 맘을 알아줘
- 신승훈 '내 방식대로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