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지대

프롤로그

by 이채윤

프롤로그

안으로 ‘걸어 잠금’…

이따금 태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심연의 속삭임을 듣는

귀 밝은 영물

-최승호/<고래의 유령>중에서



나는 10년 동안 엄마 뱃속에 숨어 있었다. 나는 그 깊은 곳에서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때로 세상에 매혹되기도 했으나 밖으로 나오기는 싫었다. 세상에 나간 자들이 심하게 절망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오스카*는 세상에 태어났으나 세상 꼬락서니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자, 세 살이 되던 생일날 자라기를 멈추고 양철북을 두드렸다. 그는 언제까지나 엄지손가락만한 꼬마이고 자라지 않는 난쟁이였다.

그 녀석에 비하면 나는 한 수 위다.

나는 엄마가 살아가는 꼬락서니를 보고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그 10년 동안 나는 안으로 ‘걸어잠금’을 하고 요리조리 세상을 살폈다.

그게 의학적으로 가능하냐고 묻지 마시라.

2002년 모로코에서 아주 기괴한 일이 보고되었다. 75세 노파가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태아를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46년 전에 수태된 그 태아는 엄마의 복강(Abdominal cavity)에서 생장하다가 9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여인의 몸은 3.7킬로그램의 태아를 석회 성분의 껍질로 감쌌으며, 미라에 가까운 상태로 품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그 노파도, 또 석회가 되어서 46년을 견뎌온 그 녀석도 참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날렵하게 엄마의 자궁 깊은 속에 숨어들어서 10년 내공(內攻)을 쌓았다. 하마터면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주 제거될 뻔했다. 이 말은 사실이다. 만약에 나의 수태를 알게 된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태아들처럼 멍청하게 그냥 자라나다가 임신중절 수술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냥 자라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잠긴 나는 내 생애 최초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자라날 것인가? 성장을 멈출 것인가?’

나로서는 참으로 화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햄릿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두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인생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성장보다는 수축을 선택했다.

임신 2주차에 생기는 수정란의 크기는 약 0.1mm이다. 이처럼 작은 수정란은 세포분열을 반복하며 3일에 걸쳐 자궁에 도착한다. 임신 3주차에는 자궁내막에 도착하여 수정란이 착상하게 되는데 이때 아기는 태아라고 불리는 상태가 되고 비로소 임신이 성립된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나는 성장을 거부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싫었다.

나는 내 몸무게를 0그램까지 줄였다. 어쩌다 1그램일 때도 있다. 나는 0과 1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말하자면 존재(存在)와 무(無)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셈이다.


먼 별 어딘가에서는 내가 깜빡깜빡 하는 것이 보이리라


지금쯤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겠지만 내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게 된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리라. 손을 들어보시라!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자가 있다면 말이다. 나는 태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10년 세월이 걸렸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특별한 존재다.

허영만과 김세영의 <사랑해>라는 만화를 보면 속도위반으로 임신한 엄마의 뱃속에서 한 생명이 전구에 불이 들어 온 듯 하트마크가 반짝반짝 빛나며 등장하고 있다. 그 광채 나는 꼬맹이는 엄마가 ‘지울까?’하고 궁리를 하자, ‘안 돼! 지우지마! 제발…!’하고 외치더니 “존재의 본질은 불안”이라는 하이데거의 기똥찬 명언까지를 중얼거리며 태어날 때까지 별 참견을 다한다. 그 아이 ‘석지우’는 아빠의 지독한 사랑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란 작자가 씨만 뿌려놓고 달아나버렸다. 태어날 존재의 이유마저 사라져버린 나는 그야말로 ‘불안’ 그 자체였다. 엄마는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과의 불화 때문에 열아홉 살의 나이에 무작정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부터 엄마는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되었고 온갖 세파에 시달리며 세상에 대해서 심한 멀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에도 멀미를 하는 예민한 영혼이 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엄마 뱃속에서 10년 내공을 쌓으며 말을 배웠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엄마의 이상한 넋두리를 통해 사랑과 슬픔을 알아갔다.


인간은 자궁 속에서부터 역사가인지 모르지.-고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엄마와 나를 구원해주는 음악이란 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에 빠져 있다가도 견딜 수 없을 때는 음악을 틀었다. 그녀의 외로운 타국 생활을 이겨내는 힘은 음악에서 왔다. 그녀가 주로 듣는 음악은 처음에는 바흐와 브람스 같은 클래식이었다. 엄마가 차분하게 음악을 들을 때면 나는 아름다운 선율에 반응하는 그녀의 마음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의 소리와 색체와 향기에 교감하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음악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엄마의 몸 속이 아닌 저 먼 우주로부터 오고 있는 신비로운 보이스(voice)인 것도 같았다. 때로 그것은 무슨 빛나는 광채와도 같이 찬란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런 빛과 소리에 휩싸일 때 엄마는 상당히 차분해져서 나는 엄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나는 엄마를 인도하는 영(靈)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태고의 검은 눈(目)이 되어가고 있었다.


먼 별 어딘가에서는 내가 깜빡깜빡 하는 것이 보이리라


내가 자라나기를 멈춘 후, 엄마는 나의 존재를 거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엄마는 나의 생명의 씨앗을 뿌린 남자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그 작자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후 엄마는 내키는 대로 순전히 자기 멋대로 청춘을 낭비하며 살았다. 사랑을 찾아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고 다녔는데 그녀가 바라는 신비로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늘 어울리지 않는 커플들이었다.

나는 지금 엄마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의 다채로운 생활덕분에 엄마 뱃속에서의 나의 10년은 퍽이나 즐거웠고 더러는 그만큼 괴로웠으나 엄청난 내공을 쌓는 세월이 되었다. 도깨비불 같은 내가 꺼져버리지 않고 10년 세월을 버티다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엄마의 특이 체질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엄마의 도도한 의지와 뿌리 깊은 자기 확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엄마의 생리혈에 쓸려서 어두운 하수구로 떨어져 오물과 함께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엄마는 어떤 곳에 잘못 온 것 같은 이방인 의식으로 언제나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편이었으나 현실을 인정하고 쉽게 타협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줄도 알았다. 그녀는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에도 모험과 여행을 꿈꾸었고 온갖 잡다한 일을 잘 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술기운이 도도한 날은 별을 보고 웃었고 영감을 받은 날은 시(詩)도 끄적거렸다.

고백하자면 엄마 뱃속에서의 10년 동안 고독하게 헤엄쳐 다녔으나 나는 따뜻하고 달콤하고 천국에 있는 듯 안온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겨 있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사이>란 것이 없다. 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코 옆에 붙어 있는 매력적인 점이거나, 태양의 흑점 정도로 영향력이 있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았다. 나는 나로써 존재하는 것보다 엄마라는 존재에 기생하는 존재로 만족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세상에 나왔냐고? 세상이 정말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보고 싶어서? 아니면 더는 거역할 수 없는 세상의 부름 때문이라고 할까?

차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이야기 할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재촉하지 마시라. 어쨌든 이제 당신은 나의 낚싯밥을 물었고-나의 독자가 되었고-그래서 당신은 나의 기막힌 인생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오스카* 권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중력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