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지대

제2장 생명의 숨소리

by 이채윤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사람이 아니라 태아를 위한 것이다.

-새뮤얼 버틀러



들리는가? 태어나보기도 전에 세상에 대해 절망하는 내 생명의 숨소리가.

적어도 내 엄마 왕수지, 그 여자에게는 내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한 생명을 잉태해 놓고도 기뻐하기는커녕 엉뚱한 생각만 한다. 우선 그 여자는 내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무척 슬프다. 나를 지우려고 결심을 하다니…그건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니다.

나는 나를 자기 품속에 담고 다니게 된 엄마라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가 나를 책임질 것인가?

문제는 내게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어떤 의견도 제시할 방도가 없다. 나는 성장을 멈추기로 극단적인 결심을 했으나, 그 역시 그녀에게 의견을 제시할 방도가 없다.

시방 나는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단세포 생명이다.

임신 21일 째인 나는 이제 막 세포분열을 시작해서 아직 태아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상태다.

인간 배아(embryo)는 임신 3주 말까지는 전배아기, 4주부터 8주까지는 배아기라고 불리며, 그 이후에야 태아라는 칭호를 얻는다. 말하자면 8주가 넘어야 비로소 사회적 인격체로 인정을 받는다. 그 전에는 이 생명을 누가 마음대로 요절을 내어도 살인죄를 물을 수 없다. 8주 전까지는 인공 중절로 나를 없애버려도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엄마라는 그 여자는 내 생명의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누가 이 범죄를 막아줄 자는 없는 것인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엄마의 태중이라는 가장 신성한 신전 깊은 곳에서 자기 엄마에 의해 살해당할 불안에 떨고 있는 가장 가련한 존재라니!. 내가 이 세상에 진입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고 있다니! 기가 찰 일이 아닌가. 어둡고 끈적끈적한 불안이 나를 휘감고 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우주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나로써 오고 있다는 것은 이루어야 할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나는 약 2억 5,000만 대 1의 경쟁을 뚫고, 철인7종경기보다 더한 난관을 돌파한 엘리트 정자였다. 탄환 로켓처럼 질주해가서 1위를 차지한 그 정자의 올챙이 같은 머리 안에는 아빠에게서 이어받은 DNA라는 유전정보가 들어 있다. 그 작은 정자의 머리에 늘어놓으면 1.5미터나 되는 DNA가 몽땅 들어가 있다. 그것은 아빠라는 사람이 훨씬 몇 대 전부터 이어받아 온, 먼 조상의 유전자 설계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된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다. 나는 그 정자를 받아들인 투명한 난자를 만나 생명의 기쁨을 구가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했다.


나는 세상이 숨을 죽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엄마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니… 나는 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슬픔이라는 거창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내 생명의 숨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므로 나는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야했다. 나는 암중모색 끝에 최초의 신경조직으로만 남기로 했다. 인간의 신경조직 세포는 한 번 만들어지면 평생을 간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하려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결코 자라나지 않으리라. 세상에 나갈 것은 꿈도 꾸지 않으리라. 그러자 나는 점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갔다.

보통의 경우,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세포가 믹스가 되어 감수분열을 통해서 하나의 세포로 변신하는 것이 수정이고 임신의 시작이다. 수정의 순간, 난자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3일째 되면 수정란은 나팔관 안에서 자궁 내부를 향해 한참 힘겹게 거슬러 올라간다. 23쌍 45개의 염색체가 수정란 내부에서 재구성되고, 1주일 정도가 지나면 수정란은 분열을 계속하여 공 모양의 세포 집합으로 변해서 ‘포배(胞胚)’가 된다. 의학적으로 ‘포배’는 액체가 채워진 풍선을 닮은 상태다. 하지만 포배 단계에서 태아는 아직 0.1-0.2mm정도의 단순한 세포집단으로 별 볼일 없는 존재이다.

자궁내막에는 자궁저부라 불리는 자궁의 안쪽에 알칼리성으로 채워져 있는 가장 부드럽고 편한 곳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수정란이 인간의 기초를 만들면서 점차 변해 가는 장소다.

2주일이 지나면, 투명한 난자는 난할을 시작하면서 작은 세포 덩어리가 세 조직층으로 나뉜다. 바깥층은 외배엽, 안층은 내배엽, 가운데층은 중배엽이다. 외배엽은 눈, 코, 귀 등의 감각기관과 피부를 포함한 털, 손톱, 땀샘 등 몸 바깥 조직을 만들어간다. 내배엽은 주로 몸의 안쪽 조직, 소화관에 연결된 내장기관과 각종 호르몬 기관 등 인체 내부의 대부분을 형성한다. 중배엽은 장과 피부 사이의 조직을 형성하는데, 위와 전신의 근육, 심장과 혈관, 뼈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제일 먼저 만들어지는 장기(臟器)의 원기(原基)가 신경조직이다.

나는 거기서 성장을 멈춘 채 신경조직으로만 남기로 했다.

자궁저부에 자리잡은 나는 알카리성 기운이 운무처럼 감도는 폭신폭신한 융털 속으로 살포시 착지해서 가라앉았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나는 융털같은 침대에 폭 파묻힐 수 있기 때문에 엄마의 몸속에서 숨바꼭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궁내막의 융털은 나의 신경관의 원기를 감싸며 보호하고 있고, 나는 자궁 내부라는 바다로 슬며시 얼굴을 내밀기도 하는데 이때가 나의 몸무게가 1그램이 되는 때이고 이것이 나의 신경의 근원이다. 이따금 자궁내막이라는 좁고도 어두운 길을 더듬더듬 헤쳐 나갔다 들어오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세상은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렇게 0과 1사이를 오가며 나를 의심하곤 한다. 이곳은 세상과 단절된 괄호 안이다. 그렇다면 나는 텅 비어버린 존재가 아닌가. 과연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나를 너무 딱하게만 여기지 마시라. 이제까지 말했듯이 나는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니라 나의 갈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그러한 삶의 시작은 내 삶의 현실이었다.

현실은 꿈이 사라지듯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 버리지는 않는다-쉼보르스카


다만 내가 아쉬운 것은 내가 사람으로서 거쳐야 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엄마의 몸속에서 자라나면서 지구상에서 생명이 진화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한다.

수십억 년 동안 지구의 모든 생물들은 바다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태아는 자라나는 사이에 어류에서 포유류로 진화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신은 지금 무슨 소리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태아는 자라나면서 지구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을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 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태아는 수정 후 32일째가 되면 머리가 뾰족한 것이 우주인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태고의 물고기 모습이라 한다. 눈은 양옆에 있고 아가미도 붙어 있다. 36일째에는 물고기처럼 옆으로 붙어 있던 눈이 정면을 향하기 시작하고, 코의 중앙부로 올라와서 마치 파충류의 얼굴 같아진다. 34일째에는 콧구멍이 생기고 입술과 턱이 생기는데 코가 곧장 입으로 통하는 양서류의 모습이다. 그리고 38일째는 코가 코다운 형태로 되며 손발의 형태가 보이면서 원시 포유류의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 태아는 40일이 지나야 어느 정도 인간다운 모습이 되는데 이때의 신장은 1.5cm 이며, 체중은 1g으로 머리가 몸의 절반 이상인 이등신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바다에서 온 생명체로써 단세포생물에서 원생동물, 그리고 물고기 모양에서, 양서류, 파충류 모양으로 변신을 하다가 비로소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자궁 속에 납작 엎드려서 더는 자라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포부가 크고 특별한 잠재성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버틴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텅 빈 공간의 악취, 텅 빈 시간의 무의미…

나는 바닥없는 구멍의 시커먼 테두리 속에서 천천히 살아 숨 쉬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이따금 해변을 어루만지는 잔물결 같은 엄마의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면서 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궁극의 여행은, 우리 내부의 공간 깊숙이 들어가는 것!


생명의 목적은 자신을 초월해서 우주의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어느 날 나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운동에서 나와 호흡을 같이하는 주파수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몸을 통해서 수태되었지만, 더 먼 우주에서 온 듯하다. 나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으로 뇌의 영역이 아닌 우주 보이스의 신경조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일까? 선택당한 것일까?

어쨌거나 나는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서, 영문도 모르고 자라나는 고생 따위를 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는 듯했다. 나는 드디어 내부에서 완결된 제로 포인트의 무중력지대를, 내면의 암호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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