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중력지대

제3장 그 여자, 수지

by 이채윤

제3장

그 여자, 수지


사람은 하늘에서 내린다.

각자 자신의 사상의 주인공이 되는 권리를 갖는다.

-스피노자



나의 엄마 왕수지는 서울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왕상원은 잘 나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장님이었고, 어머니 최영옥은 강남에 커다란 빌딩을 몇 채나 가진 재산가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영특한 두뇌 덕분에 명문대학을 나왔고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다 아내 최영옥과 중매로 결혼했다. 영특한 두뇌와 천민자본가의 결합이었다.

최영옥 여사는 졸부의 딸답게 적당히 천박했고 허영의 시장을 배회하는 영혼이었다.

왕상원은 처가의 재정적 도움으로 일찌감치 회사를 그만 두고 독립해서 적당히 성공을 거둔 말하자면 자수성가에 성공한 경영인이었다. 그는 적당히 가부장적이었고 적당히 위선적이었으며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밝혀지게 되지만, 자식이라고는 외동딸 수지 밖에 없었으나 딸에게도 그다지 다감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왕상원에게 집이란 잠자러 들어왔다 나가는 곳에 지나지 않았고 식사시간에도 그는 무뚝뚝한 제왕이었다.


가족식사를 하면서 돌처럼 차가운 침묵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왕수지의 가정에 파탄이 온 것은 IMF외환위기라는 국가적인 불운이 닥친 것과 시기를 같이한다.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위기를 벗어나는 것 같았는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버렸다. 부도 위기에 몰린 남편의 회사에 자금을 지원하다가 재무제표를 검토하던 최 여사 측 회계사가 자금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었다.

남편의 바람기를 의심한 최 여사가 사람을 붙여서 남편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십오 년이 넘도록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고, 게다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까지 있었다.

그 일은 가족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이 들어난 것이 하필이면 나의 엄마 왕수지가 고3때의 일이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바람에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어차피 한국에서의 공부에 흥미도 없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수지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 날 수지는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새우며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 탈출을 모의했다.


‘학업과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옭아매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리라’

탈출을 각오한 수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을 해치워 버렸다.

그녀는 그날 새벽, 경대서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어머니의 패물을 왕창 싸들고 집을 나왔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아버지의 지갑에서 슬쩍한 법인카드가 있었다. 그녀는 2천만 원을 인출했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패물은 일부는 몸에 걸치고 일부는 짐 가방에 넣고 무사히 공항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녀가 올라 탄 비행기는 영국행이었다.


겁먹지 말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


사리판단이 빠르고 매사에 대담하고 당찬 수지의 면모가 돋보이기 시작한 첫 작품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자유의 공기를 느끼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아듀’를 선언했다. 그녀는 부모의 추적이 두려워서 단짝 친구들에게도 자기의 행로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서울 중산층 가정의 너저분한 속물근성과 별 볼일 없는 진부함과 무의미한 일상에서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것 같은 울타리에서 용감하게 탈출했다.

미리 계획이라도 한 듯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감행된 작전이라 부모는 그녀가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에야 그녀의 탈루(脫漏)를 알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4년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수지에게 있어서 이제 가족은 사치가 되어 버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중력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