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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rce Jan 27. 2021

책 <월하의 마음>


처음엔 김환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한국 예술가 부부의 파리 생활기에 대한 재미 정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이 책을 집어들었던것 같다(나는 어째서 항상 어리석고 자만하는지).


시인 이상과의 결혼, 그리고 사별. 김환기와의 재혼. 이 두 가지 타이틀만으로 이미 많은 불필요한 오해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김향안은 이 이름들을 떠올리지 않고도 이미 대단한 인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타이틀이 김향안을 이해하기에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느끼기에 김향안은.. 계산이 없고 바로 행동하고 주어지는 그 순간을 사는 사람 같다. 1916년에 태어난 여성이라고 믿기 어려운 행보. 이상과의 결혼때도 그랬고 - 어머니에게 친구집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와 이상이 마련한 신혼방으로 갔다 - 김환기와의 결혼 때도 - 아이 셋 있는 남자와의 결혼을 집안에서 반대하자, 아이야 교육시키면 되고 우리에게는 신뢰가 있다며 이름도 김환기의 성과 아호를 따 김향안으로 개명한다 - 그랫다. 그리고 파리행. 도대체 내 예술이 세계 어느 수준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하는 김환기에게, 그럼 내가 먼저 나가볼게 하고 다음날 영사관으로 가던 모습. 정열적으로 끝없이 고민하고 일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읽다가 가만, 96년이면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 하고 계산해보면 그의 나이 여든이다.


어떻게보면 그 당시 이화여대를 수학했고 김환기는 한 때 교수직을 맡기도 했으니 안락한 삶 속에서 편한 유학 생활과 화가의 길을 걷지 않았겠냐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밥벌이에 무관심한 남편 덕에 전쟁까지 겪으며 끼니와 장작을 걱정해야하는 때도 있었고 김환기가 안정된 교수직을 접고 서울의 집을 팔아 파리로 화가의 길을 찾아 갔을 때도 상황이 나은 편은 아니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일(화가로서의 본업)들을 중심으로 잡고 생활을 채워나갔다. 아마 이 점이 내가 가장 부러운 일이었으리라. 전념할 수 있는 일. 그러나 그런 확신이 드는 일은 생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많이들 말했다. 그냥 하는 거라고. 그냥 하다보면 그게 내 일이 되어 있는 거라고. 김향안도 그런 사람 같았다. 이게 내 일인가? 묻지 않고, 내 앞에 던져진 일에 일단 몸을 던지는 것. 그렇게 김향안은 김환기를 세계적 화가로 성장하게 도왔다. 애초에 김환기가 훌륭한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김향안의 '경영(?)'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입지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파리행, 외국에서의 공부(김향안은 김환기에게 필요한 책이나 자료를 번역, 통역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그림들, 일기를 모으는 것, 도난 혹은 관리 소홀로 망가진 그림들을 돌보고 복원. 퐁피두를 비롯한 미술관들에 작품 기증 제안. 서울의 환기 미술관 건립 등 김환기를 이처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후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세계 무대에서 김환기를 보는 것은 어려웠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탁월한 경영자이며 안목을 가진 사람. 그리고 편견 없는 사람.


61년 일기장 서두 좌우명에다 "열심히 일을 할것, 좋은 생각만을 하리라." 이렇게 쓰셨다. 내 전공에 몰두하고, 잉여 감정을 버리자고.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 나도 소리내어 읽어본다.


'우리는 핑크를 좋아해서 하루에 두세 개씩 알을 까서 설탕에 절였다가 마시곤 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으로 시작하는 이 대목이 참 좋다. 처음에는 글에 '우리는'으로 시작하거나 주어없이 시작하지만 그 주체는 김환기라거나 하는 글이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일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항상 '나는'으로 시작하는 2021년의 나보다 훨씬 충만하고 개인으로서 살다가신 분인 것 같아서(물론 시대의 한계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인으로서도 충만했지만 김환기와 동반자로서도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불안하고 좌절도 많았을 시절이었을텐데 둘이 앉아 핑크색 그레이프 푸르트를 까서 미리 설탕에 절여놓고 김환기의 쉬는 시간에 둘이 앉아 차를 마시는 그 시간이 상상된다. 그런 순간들이 있어서 인생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향안님은 사랑이란 믿음이라고 했다. 믿지 않으면 사람은 서로 사랑할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이다. 라고. 열심히 일을 하고 지성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다짐하는 1월의 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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