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구다
수비니어 souvenir.
'기억''추억'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수비니어는 '선물용 기념품'이라는 의미의 영어가 되었다.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품, 수비니어.
프랑스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 단어다.
가깝거나 멀거나 외국여행을 가면 선물용 기념품 사는 일이 때로는 숙제같이 느껴진다.
여행지의 특색이 도드라지면서도 실용적일 것. 게다가 가격도 적당해야 한다.
맞춤한 기념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몇 년 전 베트남 출장을 다녀온 지인이 현지에서 구입한 루비* 지갑을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짝퉁이라는 말도 무색한 투박한 지갑.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가짜인지 알고도 손님이 몰리는 가게에서 구입했다고.
지갑에 너덜하게 달린 실밥이 보여서 직원에게 말했더니 바로 앞에서 라이터로 실밥을 지져낸 후 다시 태연하게 건네더란다.
그 기세에 감동 먹어서 사 왔다는 무늬만 루비* 지갑.
지인의 감동 먹은 사연이 재밌어서 기쁘게 받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두툼한 통장 지갑으로.
리스본과 포르투의 관광지와 도심을 돌아다니며 수십 군데의 기념품 가게를 들렀던 듯하다.
독특한 볼거리가 많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포르투갈의 길거리 기념품 가게에는 고가 상품은 보이지 않는다.
50% 할인이라고 써붙여 놓은 시계가 우리 돈 기십만 원은 너끈히 넘어서는 스위스에 비하면 포르투갈은 서민용 기념품만 판매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산품인 코르크로 만들었거나 아줄레주 타일 장식이 가미된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필기구나 주방용품 등 소소한 생활소품들이라 가격도 부담 없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여러 개씩 묶음으로 사면 가격 할인도 해준다.
기념품 쇼핑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여행 막바지, 가게만 보이면 무조건 들어갔다.
보는 눈이 생겨서인가 어느 정도 가격도 가늠이 되고 물건을 보는 안목도 생기는 듯했다,
히베이라 광장 언덕배기에 있는 기념품 가게.
밖에 내걸린 코르크 소재 가방이 눈에 확 띄어서 성큼 들어간 곳.
코르크 소재로 된 크고 작은 다양한 디자인의 가방이 입구부터 지하까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포르투갈 특산품인 코르크 제품, 슬쩍 들어보니 제법 큼직한 가방임에도 엄청 가볍다.
실용적이기까지 한 독특한 소재의 가방이라...
포르투갈 여행 기념품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책 몇 권 넣기 좋은 에코백 다자인의 심플한 가방 하나를 골랐다.
가격표가 적힌 작은 종이가 가방에 붙어있다.
44.49유로
생각보다 비싼 듯한 가격에 잠시 멈칫.
더 작은, 그래서 가격이 더 싼 가방도 어깨에 걸쳐봤다.
평소 보부상처럼 들고 다니니 작은 가방은 쓸 일이 없다.
결국 44.49유로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옆에 붙어 다니던 가게 직원은 내 어깨에 매달린 가방이 무척 잘 어울린다며 추켜세웠다.
도로 내려놓기에는 가방이 내 어깨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다.
물세탁이 가능하냐고 물으니 대뜸 주전자를 들고 와서 물을 부으려 한다.
물에 젖어도 괜찮다는 걸 직접 보여주겠다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 라이터로 너덜 내는 실밥을 사르는 베트남의 가게 직원 못지않은 패기다.
그 기세에 내가 놀래서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이 정도면 그냥 구입하는 것이 맞다.
44.49유로, 우리 돈 70,000원가량을 카드 결제했다.
영수증이 드드득 나오는 그 짧은 시간에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한국어 인사까지 건네는 직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고 친절한 우리말 인사까지 들었음에도 왜 이리 기분이 찜찜할까.
품질에 비해 아무래도 가격이...라는 찝찝함을 '정가제'라 어쩔 수 없다고 위로했다.
선물용 기념품을 사러 가서 내 것만 달랑 샀다고 머리를 치며 이곳저곳 다른 가게를 둘러보던 중, 가방을 샀던 바로 그 가게 앞을 또 지나쳤다.
그때 가게 앞으로 쑥 나오는 한국인 남성이 우리 뒤쪽 누군가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 00야~ 디스카운트 엄청 했어! 안 산다고 하니까 계속 깎아줘!"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한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
순간, 영수증 들고 가서 환불을 할까 싶은 마음도 일었다.
마땅한 환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서 얼른 마음을 접었다.
'생각해 보니 비싸게 산 것 같다'는 말을 환불 이유로 댈 수는 없지 않나.
바가지는 썼을지언정 가방은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이 신간 편하다.
어쩌겠나.
가격표가 붙은 물건은 모두 정찰제로 알고 있는 내 탓인 걸.
맨 듯 안 맨 듯 히껍하니 가벼워서 좋았던 코르크 소재 가방.
어깨에 매달린 그 가벼움이 별안간 싼티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