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리스본 2 일차- 수도원

장미의 이름

by 카이저 소제

수도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책,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14세기 이탈리아 수도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단논쟁, 그리고 그 논쟁과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는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고 했다. 달콤 살벌 로맨스 드라마 제목 같은 장미의 이름과 수도원 살인 사건, 그리고 광기에 가까운 이단 논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 이야기의 접점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스스로 이해하기로, 결국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허울은 그냥 이름일 뿐이라고.

어떻게 규정짓고 부르느냐에 따라 이단도 될 수 있고 정통도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만약 예수가 다시 부활하여 이 땅의 교회들을 본다면 대부분을 이단으로 칭할 듯싶다. 십계명의 제1 교리가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인데 목 좋은 길목을 차지한 교회들이 열심히 물신을 섬기며 살고 있으니.


포르투갈에는 수도원도 많고 성당도 많았다.

다 가볼 수는 없으니 유명하거나 오래되거나 독특한 곳만 둘러보기로 했다.

리스본에서는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카르무 수도원, 두 곳으로 결정.

카르무 수도원은 수녀원이었다고 한다. 그냥 통칭해서 수도원으로 부르나 보다.


2일 차 아침, 긴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알람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그냥 눈이 떠졌다.

해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나고, 정말 원시적 건강함이 느껴지는 여행 스타일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워낙 여행객들이 몰리는 곳이라 줄 서서 대기하느라 힘들다는 후기가 많았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오후에는 어제 못 보고 온 카르무 수도원을 들를 계획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징검다리처럼 찍고 갈 아기자기한 명소와 맛집과 카페도 당연히 일정에 콕콕 박혀있다.

부랴부랴 서둘러서 호텔 조식을 먹고 9시도 되기 전에 호텔을 나섰다.

버스나 트램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조급증이 나고 마음이 바빴다.

아까운 시간을 줄 서기로 허비할 수는 없지.

게다가 포르투갈의 택시비는 생각보다 저렴하다.

우버를 불러서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달렸다.

아, 딸은 택시를 타면 꼭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다시 확인한다. 아무래도 딸은 엄마가 못 미더운 듯.

대신 나는 그런 딸이 미덥다.

세월은 딸이라는 이름의 어린 자식을 어느새 엄마의 보호자로 만들어 놓은 듯하다.


한참을 달려 시내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사진으로 본 적 있는 발견 기념관이 멀리 보인다. 그리고 바로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이다.

파랗게 갠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연회색의 낡아 보이는 아름다운 석조건물의 위용이 눈부시다.

아름답다!

줄을 서기 위해 걸어가는데 석회석 고딕양식의 건물이 주는 강건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온다.

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겉만 보고 왔다는 인터넷 후기가 있던데, 어떻게 이곳을 겉만 보고 지나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9시 30분 개장, 9시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예상대로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날씨가 청명해서 줄을 선 채 바람과 볕을 동시에 쐬는 것도 제법 상쾌하다. 여유 있게 주변 경치와 사람 구경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웅성웅성 어수선한 소리가 나나 싶더니 표 나게 줄이 팍팍 줄어든다. 몇 십 명씩 한꺼번에 들어가니 빼빼로 베어 먹듯이 짧아지는 줄이다. 대기줄이 길다고 지레 겁먹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을 듯.

채 10분도 안되어서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리스보아 카드가 있으니 입장은 무료.

카드가 없으면 1인당 12유로. 우리 돈 18,000원쯤이다.

영화 한 편 보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봐야 할 듯.

사진이며 동영상 찍기가 편해서 짐벌이라 불리는 셀카봉에 폰을 끼우고 있었는데 남자 직원이 셀카봉을 가리키면서 포르투갈어로 뭐라고 한다.

치우라는 말 같았는데 내가 포르투갈어를 모르니 확실하지는 않잖아?

그냥 조심해서 쓰라는 말일 수도 있고.

알았다고 하고 그냥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폰을 들고 여기저기 찰칵찰칵 사진을 찍고 있었으므로.

정문 근처에서 이번에는 여자 직원이 셀카봉은 사용금지니 가방에 넣고 폰만 사용하라고 영어로 말한다.

후딱 집어넣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셀카봉은 사용금지.

수도원 정문 앞에서는 여행객들의 국적까지 키오스크 같은 기계에 모두 체크를 하고 들어갔다.

관광산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구나 싶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1501년에 짓기 시작해서 무려 100년에 걸쳐 완성된 건물이다.

다행히 1755년 리스본 대지진도 무사히 피해 갈 수 있었으며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고 위풍당당하다.

입구 계단 앞에서부터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디를 봐야 할지, 어디를 어떻게 사진으로 남겨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천장을 치받아 보다가 뒤돌아보다가 계단도 허방 짚게 된다.

1층 회랑에 들어서서 얕은 탄성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봤던 아름다운 회랑의 모습이 재현된다.

분수가 있는 마당 중정을 둘러싼 수도원의 크고 네모난 회랑은 광장의 회랑보다 더 정교하고 무게감이 있다.

회랑을 떠받치는 기둥과 아치, 심지어 돌로 된 의자 하나하나에도 세밀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수도사들이 걸어 다녔을 긴 회랑이 이제는 여행객들 차지다. 현장체험학습을 온 듯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왁자하게 지나간다.


회랑 중앙 마당에 있는 분수 위로는 파란 하늘이 쨍하다.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려 분수 앞에서 사진도 한 장씩 남겼다.

1층 회랑을 따라 걷다가 들어가 본 큰 방에는 아줄레주 타일 양식으로 벽화가 연이어 꾸며져 있었다.

벽화 그림으로 보아 구약성경 내용을 표현한 듯했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는 무엇을 했을까. 벽 중간중간에 손을 씻을 수 있게 해 둔 것으로 보아서 식당 같은 곳인가? 추측만.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비슷한 양식의 정사각형 회랑이 반복된다. 2층은 하늘로 솟은 연회색 건물과 새파란 하늘의 조화가 압권이다.

돌로 된 벤치에 앉아서 무념무상 중에 딸이 혼잣말을 한다.

"이런 곳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도가 저절로 닦이겠네."

그때 갑자기 드는 생각, 여기는 장서관이 없었나?

'장미의 이름'에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공간이 장서관이 아닌가.

진리탐구를 위해 금서를 읽는 자와 진리를 금단의 열매로 여기는 자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곳.

1,2층을 모두 둘러봐도 책을 쌓아둔 곳은 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석관이 놓여 있는 곳, 줄로 막아서 들어갈 수 없는 곳, 소소한 기념품을 진열해서 파는 곳 등은 있었지만 도서관이나 장서관 비슷한 것은 못 본 듯하다.

어쩌면 무심히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건립 목적은 다름 아닌 성공적인 인도항해를 기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누엘 1세는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해가 잘 되기를 기원하며 수도원 건설을 명령했다고. 그래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대항해 시대를 위한 러브레터'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고도 한다.

다른 것도 아닌 성공적인 인도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무려 100년에 걸쳐 수도원을 지었다니 살짝 뜨악하긴 했다. 그만큼 포르투갈의 해상정복의 의지와 꿈이 강했다는 것일까?

어쩌면 대서양 연안의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은 중세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휩쓴 이단과 교리논쟁에서는 한 발 비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오로지 부국강병의 꿈을 위해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는지도.

인간의 의지와 신의 도움에 힘입어 인도를 '발견'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 포르투갈. 그리고 단지 발견되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는 인도. 대제국 포르투갈의 이면에는 식민지 국가들의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해상강국으로 뻗어나가려는 열망과 기원으로 지어진 제로니무스 수도원, 강성한 포르투갈의 한 때를 떠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볼 만한 곳인 듯.

수도원이라는 단어가 갖는 종교적 비장함과 신비주의적인 엄숙함 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대항해 시대를 열기 위한 열망과 기원으로 지어진 것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