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포르투 3일차 - 모로 정원

사진 찍기 좋은 날

by 카이저 소제

아침 댓바람에 찾아온 모로 정원의 첫인상.

조용하다.

인적 없는 너른 정원에는 갈매기도 없다.

복닥대는 관광지에서 사람들에 치인 탓에 어디든 한산하고 조용하길 바라는 여행이었건만.

막상 적막강산을 앞에 두니 심심한 듯 헛헛한 느낌이다.

기대를 안고 간 학교 축제 현장에 사람이 듬성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다.

여행지는 역시 사람들과 부대끼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나 보다.


모로 정원은 학교 노천 강당의 축소판 같은 모양새다.

잔디로 덮인 언덕, 앉을 수 있게 잔디 사이 층층이 돌이 놓인 곳도 있다.

제법 경사진 언덕이라 사람이 몰려 앉아도 시야가 가릴 일은 없을 듯.

오르막의 꼭대기는 돌과 나무와 꽃이 약소하게나마 어우러져 있다. 정원이라는 생색만 낸 느낌이다.

도루 강변의 경치와 일몰을 보는 곳이니 생색만 낸 정원에 실망할 바는 아니다만 뭔가 허전하다.

근데 참 이상하다.

내 머릿속 모로 정원의 이미지는 '적적함' '사람 없는 노천강당' 같은 밋밋한 느낌인데, 폰 갤러리 속에 저장된 모로 정원은 꽤나 몽환적이다.

회색빛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나 여기 건재함'을 보여주듯 구름뒤 음영으로 이글대는 느낌.

무심코 찍은 모로 정원의 풍경사진을 '어린 시절 고흐가 괴발개발 습작한 그림'이라고 하면 '그래?'라고 믿을 듯도 하다.


흔히 '남는 것은 사진'이라고들 한다.

여행 가는 사람에게 '좋은 사진 많이 남기라'는 말을 덕담 삼아 하기도 한다.

이때 '사진'은 '추억'과 동의어다.

때로는 글로 기록하는 것보다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내 마음과 생각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글보다는 사진이 있는 그대로를 더 잘 보여준다.

왜곡된 기억을 바로 잡아주기도 한다.

모로 정원에서 남긴, 언제 찍은 지도 기억나지 않는 사진 한 장 덕분에 이곳이 얼마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는지를 새삼 떠올리게 됐으니.


정원의 오른쪽 방향, 까마득히 높다란 절벽 위에는 흰색 원통형 건물이 있다.

독특한 외양에 자꾸 눈이 간다.

건물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을 꼬물꼬물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인다.

'저기가 어디지?' 라는 말을 하기 바쁘게 딸이 폰을 검색한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세라 두 필라르 수도원이라고, '피곤한 다리의 피로를 잊을 만큼' 전망이 환상적인 곳이란다.

역시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성당 아니면 수도원이다. 하긴 우리나라 산세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사찰이 있다.


내친김에 가보자고 호기롭게 나섰다.

큰 도로를 따라 걷자니 생각보다 길이 멀다.

골고다 언덕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도 올라가야 한다.

갈 길이 빤히 눈에 보이니 지레 지친다.

돌아섰다. 더러 객기도 부리지만 포기도 빠른 우리.

다리의 피로를 잊을 만큼 좋았다는 여행후기가 머릿속을 맴돌긴 했다.

경치 전망보다 수도원을 못 봤다는 것,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히베이라 광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리 건너편 강변에 자리 잡은 히베이라 광장은 강변을 따라 식당이 즐비하다.

노천카페의 하얀 천막이 강 건너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히베이라 광장을 가려면 다리를 다시 건너야 한다.

그 무서운 2층 다리를 또 건널 필요는 없다.

동루이스 다리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다.

즉, 모로 정원에서 1층 다리로 내려가는 길이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길을 찾아서 정원의 가장자리 난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분홍색 페인트로 큼지막한 글씨가 그려진 좁은 계단이 나온다.

왠지 계단 끝에는 화장실이 있을 것 같은 외진 느낌이다.

반신반의하며 걸어내려갔다.

좁은 계단은 곧바로 길고 구불한 내리막 골목길로 이어졌다.

낙서에 가까운 그림이 그려진 벽을 따라 급경사의 골목길이 굽이돈다.

젊은 친구들에게는 힙해 보일 수 있는 골목, 내 눈에는 살짝 우범지역 같은 느낌.

제법 가파른 굽이도는 내리막이라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 팍팍 주고 걸었다.


분홍색 글씨가 선명한 계단과 반들한 돌길이 미끄러웠던 내리막길.

사진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선명히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막손으로 무턱대고 찍어 놓은 사진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사진첩을 뒤져보니 모로 정원 부근에서 찍은 사진에는 배경으로 불쑥불쑥 박제된 사람들이 없다.

너무 조용해서 밋밋했던 이른 아침 모로 정원.

남겨진 사진으로 돌아보니 그 시간이 참으로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이었구나 싶다.

늘 그렇다.

지나고 나면 보인다.

그때는 잘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