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걷다가
리스본에 도착한 첫날, 거리를 걸으며 놀랐던 것.
선명한 빨간 신호등에도 아랑곳없이 휙휙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다.
오히려 차들이 길 건너는 사람들을 기다려준다.
몸에 밴 습성을 어쩌지 못한 우리는 소심하게 녹색불이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
코메르시우 광장을 코 앞에 둔 좁은 도로 앞.
신호등은 빨간불이었다.
역시나 신호등 무시하고 태연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들.
걔 중에는 정복 갖춰 입은 경찰관도 있었다.
따라서 건넜다.
로마에서는 로마법, 포르투갈에서는 이곳의 관습법을 따르기로.
포르투갈에서 불과 며칠을 지냈다고 신호등 무시하고 길 건너는 일이 어느새 아주 몸에 배어버렸다.
현지인보다 더 무단횡단을 잘한다는 칭찬을 딸한테서 듣기도 했다.
10개들이 나타 박스를 들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 베이커리에 들러서 머핀 하나랑 크로와상 한 개도 샀다.
나타만 먹으면 물린다고.
호텔로 가는 길은 아침에 걸었던 길의 역방향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를 다시 스쳐 지나가고 포르투 시청도 지나간다.
한 번 와봤던 길은 그새 눈에 익어서 마치 오래 산 동네처럼 편안하다.
편히 쉴 수 있는 '내 방'으로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 편하다. 일종의 귀소본능인가.
젖은 수건이 쌓여있던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우렁각시가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이겠지.
씻고 잘 쉬고 심신을 재정비한 후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구글지도상으로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식당들이 있다고 한다.
이미 어두운 길이지만 한 번 다녔던 곳이라 거리낌 없이 걸을 만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큰 도로를 건너고 나니 좁은 차도에 면한 더 좁은 길이 이어진다.
처음 걷는 길이다.
가로등이 희미해서 어둑어둑하다
게다가 인적이 없다.
둘이 나란히 걸을 수가 없어서 앞뒤로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데 무섬증이 인다.
이렇게 다녀도 되나 싶은 걱정.
이렇게까지 별스럽게 저녁을 먹으러 가야 되냐는 짜증도 났던 것 같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코트 깃을 잔뜩 세운 여성, 우리를 보고 멈칫한다. 우리도 마찬가지.
이건 뭐 사람이 없어서 무섭기도 하고 사람이 보여서 무섭기도 하다.
골목 옆으로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보이는 순간, 딸이 돌아선다.
'대마초를 피워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고 속삭인다. 무섭단다.
사실 나도 무섭다고, 특히 밥 먹고 돌아올 늦은 밤을 생각하니 걱정된다고 말했다.
후딱 돌아섰다.
갈 때는 딸이 앞이지만 돌아서니 내가 앞이다.
무섭다는 말을 입밖에 뱉으니 무서움의 실체가 또렷해지는 느낌이다.
낯설고 으슥한 밤길을 겁도 없이 돌아다니다니.
숨이 차오를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벗어났다.
갑자기 비까지 퍼붓듯 쏟아진다.
우산을 받쳐도 옷이 젖는다.
큰 도로 앞에 오니 서너 명이 우루루 무단횡단 하는 것이 보인다.
이때다 싶어 후다닥 뛰어서 같이 건넜다.
후다닥 뛰면서 뒤를 돌아보니 딸이 안 보인다.
나보다 뒤처져서 걷고 있던 딸은 무단횡단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넓은 도로 맞은편에서 망연자실 서있는 딸.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걸음이 아주 빠르다는 것을.
아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딸이 나보다 걸음이 느리다는 것을 잊었을 리가 없다.
잊었다고 한 들, 최소한 길을 건너기 전에는 딸이 옆에 있는지 챙겼어야 한다.
어쩌면 밥 먹을 때마다 식당 찾아 헤매는 이 상황에, 이 상황을 만드는 딸에게 역정이 났었나 보다.
그 역정을 혼자서 후다닥 가는 것으로 온몸으로 표현했나 싶다.
어른스럽다는 것은 나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차가 뜸할 때 도로를 건너라고 손짓을 해도 모른 척한다. 혼자서는 무단횡단을 할 성격이 아니다.
횡단보도를 찾아 오르막을 걸어올라 간 딸은 녹색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길을 건넜다.
시위하듯 부러 더 천천히 걷는 듯하다.
잔뜩 뿔이 나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뒤에 따라오는 줄 알았지...." 옹색한 변명에
"......" 무언으로 화를 낸다.
화가 난 이유?
글쎄. 복합적이지 않을까 싶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식당을 찾아가는 불편한 상황, 그것도 중도 포기, 무엇보다 혼자 내빼듯이 가버리는 엄마가 서운했겠지.
아무쪼록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마음을 풀어야 한다.
불과 10여 분 전에 갈아입은 옷이 다 젖은 채로 후줄근하게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뜨끈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의 해물밥이 먹고 싶은데 호텔 메뉴에는 해물밥이 없다.
돼지갈비구이와 참치 샐러드 하나를 시켰다. 그리고 스크루 드라이버 한 잔.
메인 메뉴가 아닌 샐러드를 시키냐고 직원이 굳이 되묻는다.
'양이 너무 많아서 간단하게 샐러드를 먹겠다'라고 말하니 고개를 주억거린다.
메인 요리가 아닌 전채 요리를 식사로 주문하는 것도 딸은 불만인 모양이다.
실리주의자인 엄마에 비해 딸은 격식을 따진다.
여행 5일째 접어드니 서로의 차이점이 도드라진다.
참치 샐러드에는 참치와 토마토가 가득하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미역줄기가 많이 들어 있었다.
익숙하고 반갑고 싱싱한 맛.
서양인들은 미역을 안 먹는 줄 알았는데 해산물 강국은 역시 다르다.
짭짤하고 향긋하고 오독오독 씹히는 미역줄기를 먹으니 공깃밥 생각이 난다.
저녁을 먹고 달콤 쌉쌀한 스크루 드라이버를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마음이 풀린다.
안 풀리면 어쩔 건가.
방은 하나고, 어디 갈 데도 없고.
스크루 드라이버를 마시면 나사 조이듯 취할 줄 알았는데 마신 둥 만둥 말짱하다.
우왕좌왕 허둥대는 실수연발 여행이지만 나름 올올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나 보다.
보드카 알코올발도 안 받을 만큼.
<포르투 2일 차 동선>
(어딘가 허전한) 상 벤투 기차역 - ( 복닥대는 ) 렐루 서점 -
(클래식한 ) 카페 마제스틱 - (이름 기억 안 나는 )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
(영혼의 예배당) 알마스 성당 - ( 편히 쉴 수 있는) 스타벅스
(거름 지고도 간다는) 볼량시장 - ( 눈뜨고 코베인) 파브리카 다 나타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고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