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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향기마을 Dec 09. 2022

선생님이라 불리기에

나를 지켜낸 기쁨



다음 주면 올해 방과 후 수업이 모두 끝난다.

해서 오늘과 다음 주까지 모든 아이들의 책이 마무리되어야 한다.

어느 때보다 가장 바쁜 일정이다.


아이들마다 수업 시작 시기도 다르고 속도도 역량도 다르니 당연히 각자가 만들고 있는 책도 진도도 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아프거나 여러 집안 일로 빠지고 시도 때도 없이 현장학습을 이유로 결석하면 그 차이는 더 커지게 된다.


이렇게 차이가 벌어지면 수업 진행이 정말 어다. 아이들마다 각각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인데 아이들이 생각하고 써나가는 이야기도 다양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뇌의 역량을 풀가동해야 한다.

아마 나는 이 때문에 녹슬지 않는 지능을 유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와중에 최근 지난 20년 세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케이스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북아트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열정으로 수업을 들으며 활발하게 책 작업을 해오던 3학년 소녀가 있었다.


글과 그림, 생각 모두 정형화된 것이 하나도 없고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특징인 소녀인데 그것 자체만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고 표현이 자유로웠다.

열정도 대단하고 고집도 있어 다루기가 어렵고 울기도 잘 서 그 기분을 매 시간 눈여겨 살펴야 했다.

그래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야기 구성이 재밌어서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다.


런데 2학기가 넘어서  부터는 학교 급식 시간에 점심을 먹고 북아트 교실로 오는 시간이 점점 늦지고 급기야 시작 시간보다 30~40분이 지나서야 들어서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느라 소녀의 엄마와도 통화를 하고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까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단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는 몹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녀가 매번 늦게 오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학교 급식을 두 번 세 번 갖다 먹으면서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

아침을 먹지 않고 학교에 오고 점심 식사 시간까지 배고픔을 참다가 친구들이 다 교실로 올라간 후에도 급식실에 홀로 남아 배가 부를 때까지 먹고 천천히 일어서는 거였다.

교실에 돌아와 알림장을 쓰고 나면 당연히 북아트 교실로 오는 시간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엄마가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에 늦잠을 자면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빈 속으로 학교에 오고 오전 내내 기다리는 건 급식일 수밖에. 누구를 탓할 것도 없고 그저 안타까울 뿐. 하지만 이렇게 늦어지면 시간 내에 책을 완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소녀의 상상 이야기가 책으로 만들어져 고단한 엄마의 손에 쥐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학기 내에 책 완성시키려면 수업이 끝난 후 추가 수업을 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이 돌아간 후 소녀만 남겨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맘 편히 책을 완성하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 아니지만 어렵게 꺼낸 그 이야기가 너무 아까웠고 그건 마치 지금 아니면 곧 사라질 유성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어른들의 이야기보다 현실적이다.

그들은 현실의 친구와 손에 쥐어진 모든 것 그리고 눈으로 보며 경험한 것에서 출발한다.


소녀의 이야기 속에 그 짧은 인생의 기쁨과 아픔이 담겨 있고 거기서부터 만들어지는 상상의 세계는 그들이 앞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미래가 된다. 그 방향과 색깔과 밝기가 얼마나 찬란할지 지금 순간순간 가슴에 한 겹씩 새겨질 어른들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아니겠는가.


 선생님이라 부르고 주머니에 숨겨놓은 빵조각 같은 비밀을 들려주는 그들에게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은 지금껏 나를 건조한 삶의 무력감에서 지켜낸 소중한 기쁨이다.


다음 주 수업은 정말 결전의 날이다.

제발 빠지지 말고 보내달라고 엄마들의 폰으로 문자 호소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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