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거리

숨소리는 들리는 사이일까?

by B의취향

뒤늦게 몰아보기를 한 흑백요리사 시즌2 마지막회에서 살짝 눈물이 날뻔 했다. 최강록 세프가 자기를 위한 요리를 소개하며 "조림을 잘하는 '척'을 했다. 공부도 하고 노력도 했지만 척하는 삶을 살았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90초도 쓰지 않았다." 같은 말을 했는데 이상하게 모든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척을 하고 사는 중이다. 괜찮은 척, 좋은 사람인 척, 능력있는 척, 참을 수 있는 척, 사랑하는 척까지...! 꽤나 여러 순간에 꽤나 여러 스킬을 사용하며 '척'하는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또 노력을 한다. 마치 레이어를 쌓듯 나의 가면들을 쌓아가며 말이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척을 하려고 해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나 조차 속을 정도로 척의 달인이 되기도 한다. 이쯤되면 척을 하는 것인지, 진짜 내가 그런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무려 나 자신에게조차 척을 할 때도 있을 정도다.


무던한 '척' 하다보니 진짜 둔해졌다


내가 했던 가장 성공적인 척은 무던한 척이었다. 나를 대상으로 내가 무던한 척을 하다니.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 시절 한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와 사이는 처음엔 그럭저럭 했으나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멋모르던 시절 윗사람이 시키는 일이라면 제깍제깍 하던, 선배가 유난히도 무섭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쌀쌀맞고 어려운 선배 눈치가 보였고, 눈치를 보면 볼수록 선배는 더 화가 나는 이상한 사이클이 만들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2년을 끙끙 맘 고생을 했다. 회사에서 나와 집까지 1시간을 걸으며 펑펑 울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지금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길이 없다.


2년 후 선배의 퇴사로 전쟁같던 나의 회사 생활은 안정을 찾았고, 그 이후에 다시 만난 일은 없다. 다만 그 일을 겪은 후유증인지, 그때부터 나는 점차 무던한 사람이라는 포장지를 썼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화도 없고 세상은 괜찮은 곳이라는 신선 소리를 자주 하게 됐다.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라는 성선설을 설파하며 예민하지도 까칠하지도 않은 척을 했다. 돌이켜보면 이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척이라기보다 나를 위한 척에 가까웠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람의 일에 관려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괴롭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무던한 척을 하다보니 정말로 어느 정도 둔해지는 데 성공했다. 주변 상황에 덜 영향을 받고 내 할일만 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누구를 욕하는데 끼지 못했다. 부정적인 면은 거의 보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나쁜 면을 걸러내고, 나쁜 면에 둔해졌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런 성향이 팀원일때는 도움이 되었는데, 팀장이 되니 약점으로 변했다. 구성원들의 변화를 기민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마음을 세세하게 들여다 보지 못했다. 내 마음과 같겠거니 여겼던 부분들이 상처와 화살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관계의 힘듬을 공감하지 못해 이사람, 저사람에게 모두 동네 북이 되기도 했다. 때론 위아래로 꺠지기도 했고. 이런 된장!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좋은 게 좋은 인간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여긴다. 자기 할일만 하면 그외의 다른 부분은 개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가 있다면 굳이 단체 행동을 하지 않아도, 굳이 기분을 맞추지 않아도 괜찮다. 일로 만난 사이에서 일정한 거리감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성향이나 습관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은 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가졌기에 이런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간극을 줄여가면서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사회생활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놓친 부분이, 이렇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거리감도 좁혀야 하고 싫어도 함께 하는 것도 있어야 하고 개인적인 영역도 어느 정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 또한 개인의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나고 보니 내 선택이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걸음 더 다가갔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가까워 졌으면 어땠을까? 불편한 부분이라고 피하지 않고, 이야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후회들이 조금씩 남는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이런 후회는 타인과의 관계 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생겼다. 나는 남과만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도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고작 45초, 숨쉬기가 뭐 특별할까?


어쩌면 40년 넘게 함께 살았으며, 치부를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 자신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를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뭘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깜깜하다. 그래서 요즘 과거의 재미를 느꼈던 일, 행복하다고 생각됐던 일, 화가 났던 사건, 불편하다고 느꼈던 상황 등을 하나씩 적으며 나를 되짚어 보고 있다. 한번에 찾을 수 없는 것들이라서 벽에 종이를 붙여 놓고 생각날 때마다 적고 있다. 한 달 정도 꾸준히 적어보고 나서 자기평가 시간을 가져볼 계획이다.


나와 친근해 지고 싶어서 시작한 또 다른 일은 아침 10분 명상이다. 거창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일어나서 씻고 물을 한 잔 마신 후에 10분 정도 눈을 감고 앉아있는다. 물론 오만가지 생각이 흘러다니는데 아주 짬깐이라도 무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숨쉬기에만 집중하는 연습에 한창이다. 이제 한 45초쯤 명상에 성공하는 것 같다. 명상을 시작한 계기도 책 속 한 구절 덕분이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도 자기 몸을 드나드는 호흡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러져 사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지금껏 내 몸에 들어온 숨 한자락의 존재조차 생각하지 못했구나 싶어서, 나와 나의 거리가 그만큼이나 먼 것 같아서 숨쉬기 시간을 굳이 만들었다.


우숩게도 고작 45초 뿐이지만 머리가 텅진 찰나가 굉장히 반갑다. 덩달아 몸도 머리도 가벼워 진다. 숨소리는 들리는 사이로 점차 발전하고 있는 나 자신과의 관계도 비교적 만족스럽다.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은 불안과 걱정 속에 있지만 괜찮아 지는 시간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건 희소식이 분명하다. 45초가 45분이 되고, 반나절이 되고, 하루가 될 때까지. 그래서 내가 원할때는 숨쉬기만이 나를 인지하는 요인일 정도로 텅 비울 수 있을때까지 나와의 거리 줄이기에 집중해 볼 계획이다. 나와 나 사이 거리인데,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줄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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