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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May 23. 2021

차갑고 따뜻해, 운동하는 하양

스피닝과 눈

  사십 오초. 사십육 초. 사십칠 초.


 근력 운동을 하거나 격한 유산소의 정점에 올라섰을 때면, 시간이 순간적으로 가장 느리게 흐름을 실감한다. 레인보우 플랭크를 스물여섯 개쯤 했을 때, 이만하면 그만 일분이 다 차고 그만하라는 신호음이 나올 듯한데도 고개를 들어보면 고작 사십팔 초이다. 십이 초는 더 버텨내야 한다. 변태처럼 힘든데 기쁘다.


하얀 세상이 기분 좋게 나를 이끌고 몽돌해변의 돌처럼 하얗고 단단한 풍경을 내 앞에 깔아낸다. 하얀 파도가 치는 바다로 이끌려간다.


 격렬한 운동을 하는 순간, 나는 그 어떤 순간보다 ‘하양’에 가까워진다.


  늘 재밌고도 우울한 생각이 넘쳐나는 내 머릿속이 하얗게 아득해지는 그 순간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오늘도 운동을 한다. 운동을 시작하기 직전의 내 몸은 매일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어떤 날은 한없이 딥한 블랙이고, 어떤 날은 날아갈 듯한 민트이다. 그런데 운동을 시작하면 서서히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정점에 오른 순간, 완벽한 하양이 된다. 그 순간이 견딜 수 없이 좋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스피닝이다. 스피닝은 기본적으로 매우 격렬한 동작을 수반한 쉬지 않는 자전거 타기이기 때문에, 고급반 수업을 들어서 메들리로 끝없이 몰아칠 때면, 40여 분간 지속되는 하양을 느낄 수 있다. 그 뜨거운 하양의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가장 깨끗한 휴식의 순간이다. 하나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것 없이, 순간에 나를 맡겨 버리는 최고의 시간. 최고의 하양 속. 스피닝을 하고 있자면 나는 순간적으로 무대 위에서 요염한 춤을 추는 여자 아이돌이 됐다가, 또 격렬하고 터프한 동작을 거칠게 해내는 남자 아이돌도 되었다가, 그저 무아지경으로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는 흥 많은 여자가 된다. 자전거 위에만 올라서면 신기하게 자신감이 차오른다.


 스피닝은 같이 하는 운동이자 혼자 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내 마음에 쏙 든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 팀 플레이를 방해할 일이 없으면서도, 함께하는 기쁨은 느낄 수 있다. 보통 노래의 특정 부분에서 함께 큰소리로 구호나 기합을 외치는 경우가 많기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에도 큰 영향을 받고 서로에게 힘을 주는 운동이다. 으와아악!! 예!! 예!! 예!!!!! 하고 배에 힘을 가득 주어 소리를 뱉어낼 때에는, 일상의 스트레스가 소리로 변환되어 어딘가 우주 끝까지로 모조리 다 흩어진다. 개운하다. 동작을 온전히 해내고 자전거 페달을 박자에 맞춰 밟아내는 일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다. 못하면 쉬었다 해도 되고 완벽한 동작을 모두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할 수 있다며 자신을 다독이고 올라선다. 시작하기 전에는 오늘은 진짜 다 못할 것 같은 날도 꽤 있는데, 일단 세 곡 정도 타고나면 기분 좋게 몸이 달아오른다. 나머지 시간은 마법처럼 흘러간다. 간주 시간에도 쉬지 않고 오롯이 끝까지 페달을 다 밟아냈을 때, 그때 나를 이겨낸 그 기분이 참 좋다. 나는 번지점프도 좋아하고 미친 듯이 쉬지 않고 몰아치는 격렬한 스피닝 수업도 참 좋아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섭지 않으냐고 힘들지 않으냐고 묻는다. 나는 체구도 작고 보통사람보다 체력이 좋지도 않지만, 악으로 깡으로 해내는 일에 능하다. 그런 자신이 좋다.


 순간적으로 가장 뜨거운 하양이 되는 순간의 나를 가장 사랑한다. 그래서 요즘 나의 ‘쉼’ 리스트에는 늘 스피닝과 뜨거운 하양이 빠지지 않는다. 스피닝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빠른 속도로 등산을 하거나 한강으로 자전거를 두 시간 밟는다. 혹은 격렬한 홈트를 따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제부터는 감기 기운이 도져서 오늘 아침은 도저히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중독처럼 ‘하얀 세계’가 그리웠다. 결국 주말에도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왔다. 조금 몸이 괜찮아지니 또 하얀 세계가 그립다. 집에 일반 실내 자전거를 들였는데 격렬한 스피닝을 감당하기엔 자전거가 참 힘들어 보였다. 스피닝 자전거 렌털 서비스 업체가 생겼다고 해서, 상담을 받아볼까 고민 중이다. 유튜브에도 이제는 제법 스피닝 강의가 생겨나서 주말에도 나를 하양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상만 해도 흥이 돋는다.  








 최근 갑자기 한여름 같은 낮이 몇 번 다가오면서, 사실 나는 더욱 많은 하양을 상상했다. 후덥지근하고 뜨거워지기 시작하니, 이놈의 ‘반대 계절을 그리워하는 병’이 도진 것이다. 홋카이도의 눈을 많이 상상했다. 눈은 하양을 떠올렸을 때 가장 빨리 다가오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눈은 만지면 차가운데, 신비하게 눈과 관련한 추억은 모두 따뜻하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을 던지며 누군가와 보냈던 모든 순간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마음의 방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만의 눈과 관련한 특별한 추억이라면, 홋카이도 여행이 있다. 홋카이도는 내가 가장 많은 눈을 보고 밟은 곳이기도 했다. 도시 오타와에서 내 무릎도 넘게 하얀 눈이 쌓인 날, 새하얀 모자를 쓰고 남동생과 함께 하얀 모찌를 사 먹었다. 여행 준비를 제대로 안 한 탓에, 쌓인 눈 속에서 길도 잃고 앞이 막막했던 순간이었는데, 그 순간 눈앞에 보이던 하얀 이미지들이 모두 따뜻했다. 찹쌀떡 가게의 주인이셨던 하얀 앞치마를 맨 일본 아주머니는, 길을 잃은 젊은 남매가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셨다. 가장 가까운 역까지 직접 당신의 차로 데려다주겠다 말씀하셨다. 고립될 뻔했던 무서운 상황 속에서 그녀의 따스함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고작 500엔짜리 모찌를 하나 사 먹고, 삼만 원 치 이상의 택시값을 벌었다. 그런데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는 의심을 덜어내는 깨끗한 하얀 마음을 그 순간 배웠다. 그 친절이 감격스러워서, 그 뒤로도 내게 하양은 참 따뜻한 색으로 다가온다. 운동할 때의 감정적 뜨거운 하양이 아닌데도, 차가운 눈을 닮은 하양은 신비하게도 이렇게 나에게 따뜻하다.





 친구는 하양이 가장 야한 색이라고도 말했다. 가장 순수한 색이기도 하면서, 또한 더러워지기 쉬운 색이고, 유지하기도 힘든 색이니까, 어쩌면 가장 매력적이고도 섹시하다고. 내 몸과 대화를 많이 하고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내겠다고 최근 몇 년 더욱 결심했기에, 하양이 탐난다고 더욱 목소리를 높여 말해본다. 하양의 도화지 같은 깨끗함과 순수함이 부럽게 다가올 때가 있다. 또한 반대로 내가 하양을 만나 여러 색을 입히고 더해 보고 싶은 재미도 느끼고 싶기도 하다. 이십 대 때와는 달리 이제는 속옷도 레드 보다는 화이트가 더 본격적인 것만 같다. 특별한 일이 있다면 하얀 속옷을 준비하는 여자가 되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자동차의 시트 색도 블랙보다는 화이트가 역시나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늘 용기가 안 나서 못 샀다. 내가 저 하양을 더럽히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자꾸 탐이 난다. 하얀색이란 그런 색인가 보다. 집안의 물품들도 하양으로 도배하는 것이 좋아졌다. 하얀 물건들은 옆에 있는 것들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 인해서 그 고혹미를 더욱 발산한다. 피부 위 옷감에서도 그렇고 까만 밥솥 옆에서도 그러하다. 새하얗기 때문에 눈길을 끌고, 그 옆의 이까지 매력적으로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어느 색과도 잘 어울리지만, 어느 자리에 있어도 누구도 함부로 그 존재감이 없다거나 혹은 과하다고 욕하지 않을 색. 바탕이 되지만 어느 곳에나 꼭 필요한 색. 매력적인 하양.



하양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길게 표현을 했지만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단순하고 과한 욕심이다. 글을 쓰면서 신기한 점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쓰고 사람들과 소통한 뒤에는, 그 대상이 더더욱 좋아진다. 파랑 글을 쓰고 나서는 파란 책을 선물 받았고, 블루와 관련된 모든 아이템들이 더욱 빛나 보였다. 베이글 글을 쓰고 나서는 Bagel이라는 음절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졌다. 얼마 전 연극 수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별명을 뭘로 하고 싶냐길래, 나도 모르게 ‘베이글’이요,라고 말했다. 베이글이 먹고 싶은 촐촐한 심정에다가 둥글 둥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을 담은 순간적인 네이밍이었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와우,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베이글녀란 얼굴은 베이비 페이스이고 몸매는 글래머러스한 여자잖아요!”라고 말하셨다. 아뿔싸. 갑자기 보통 사이즈의 소중한 내 가슴과, 요즘 힙운동을 덜해서 모자란 나의 엉덩이가 떠올라 민망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원래 희망과 꿈은 크게 가지는 법이라고 했다. “아하하- 사실은 아니라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서요!”라고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던져놓고 틀림없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을 거다.


하양을 추구하지만, 운동하는 순간 외에는 파랗고 빨갛고 막 변하는 나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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