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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Jun 05. 2021

같은 하늘색은 없다

by live person

 

 늘 ‘살아있고’ 싶었다. 누군가가 그 어느 때 내 사진을 찍더라도, ‘살아있는’ 표정을 하고 싶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몰래 찍어 주는 사진을 봐도 싫지 않았다. 엽기적으로 표정이 한쪽으로 몰리거나 특정 신체부위가 부각되어 우스울 수는 있어도, 그마저 익살스럽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살아 움직이는 싱그러운 한 여자가 사진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표정하고 죽어 가는 이가 아님에 안도했다. 다채롭고 활기차게 사는 일만이 ‘살아있는’ 감사함을 누리는 길이라고 착각했던 때였다. 그런 발랄한 표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이 그때까지의 내게 주어지고 있었던 것은, 그저 하늘의 축복이었었다.


 그런데 그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란 것을.


어느 날 그의 사고가 일어났다. 힘든 일은 발버둥 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죽음은 정말이지 급작스럽게 한 여자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와르르 삶의 유리 성을 무너트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통의 시작은 어느 가을, 찾아왔다. 여름에 그 사고가 있었으니까. 사고로 슬픔에 잠긴 지 한 달 즈음 지났을 때였다. 느닷없이 배 주위가 불에 타는 듯 아팠다. 특히 왼쪽이 더 심했다. 내 왼손을 잡아주던 그의 오른손이 자꾸만 생각났다. 엎드려 있으면 눌려서 더 아팠고 가만히 서있어도 누군가 내 배를 계속해서 수 천 개의 바늘로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그 고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처음에는 내가 감내해야 할 당연한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로 먼저 떠난 여름을 보낸 자가, 그 정도 아픔도 없을 수가 있을까. 나는 사람이 먹을 수도, 숨 쉴 수도, 잘 수도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이별의 형태가 아니었다. 묵묵히 고통을 마주했다.


   세상은 단풍이 들기 시작했는데,

내 맘은 핏물이 드는 듯했다.


 하늘에서 어느 날 무섭고 소스라치게 뜨거운 운석이 나에게만 떨어진 듯했다. 그 운석은 조각 조각나 내 머리를 먼저 강타했다. 그 뒤로 심장을 찢고, 파편을 만들어 뱃가죽 여기저기에 박혔다. 온몸이 고통에 휩싸였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죄를 신체적 아픔으로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 고통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니,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한 남자가 있었다.


 장례식장에서부터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던 나를 아빠는 집으로 데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몇 주가 넘도록 나를 보살폈다. 내가 먹든 안 먹든 죽을 만들어 나를 식탁에 앉혔다. 다정하고도 지독한 애정이었다. 그냥 나를 내버려 두도 괜찮은데. 차라리 내가 따라서 죽어버린다면 좋을 텐데. 이 숨이 다하면 이 고통도 없어질 텐데. 억지로 내 입가로 들어오는 숟가락을 흡수할 의지가 내 안에는 없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멍하니 죽음을 상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의지라는 것을 완. 전. 히 잃었다. 그랬더니 몸은 그에 응답하듯 하염없이 더 무너져 갔다. 살면서 겪었던 모든 작은 병들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진통제를 달고 사는데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음식을 먹으면 위가 따끔거려서 삼킬 수 조차 없었다. 몇 년 전 한 번 앓았던 발등 습진이 재발하며 간지러웠다. 온갖 벌레들이 계속 내 피부 위를 돌아다니는 듯했다. 그중에 가장 심했던 것은 정체모를 과한 복통이었다.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던 어린 시절의 고통이 매일 밤 다가왔다. 병원도 가지 않고 몇 주를 버티던 나는, 아빠 손에 끌려 내과와 산부인과의 문턱을 지나다녔다. 처음에 의사는 나에게 골반염이라고 했다. 상태가 심하니 매일 병원에 와야 한다고. 그렇지만 골반염은 불치병은 아니니 한 달 안에는 무던히 낫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항생제가 들으면 며칠 만에라도 적어도 통증은 조금 견딜 만한 수준으로 약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온갖 항생제를 바꿔서 투여했다. 염증의 수치가 실제로 떨어져도, 배에 불이 붙은 듯한 고통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릴없이 더 센 진통제를 받아 들었다. 진통제로 연명하는 시간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데려가 어딘가의 병원 침대에 눕히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빠는 소용이 없을지도 모를 각종 침과, 한약, 혹은 수액을 애타는 눈으로 내게 투여했다. 그런데도, 계속 복통이 심했다. 마치 하늘에서 부르는 것 같았다. 그 육신은 큰 상실로 이미 쓸모없게 되었으니, 남은 뱃속 장기를 어서 스스로 불태운 뒤, 그냥 생을 떠나버리라고. 누군가가 나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가 부르는 것 같았다. 환청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죽여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미친 사람처럼 모든 걸 포기하려는 나를 데리고 더 큰 병원들을 찾아갔다. 큰 병원들에서는 과명 뒤에 자세한 분과명이 많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 어떤 단어도 식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누군가 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조차 사치라 여겼다. 아무리 진찰을 하고 최첨단 장비로 더 비싼 사진을 찍어도 나오는 명확한 병명은 없었다. 한 의사가 말했다. “정신적인 이유이신 것 같아요. 항우울제를 일단 드셔 보실까요”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우울제를 복용한 지 얼마쯤 지나자 신기하게도 복통과 분노와 슬픔이 조금씩 사그러 들었다.


 아무 때고 졸렸다. 많이 잤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외면하려 잤고, 자는 방법 외에는 시간을 버틸 방법이 없어서 잤다. 때로는 웃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그의 꿈을 꿨고, 여전히 배갯잎을 눈물로 적시며 눈을 떴지만, 뱃속의 통증이 조금씩은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아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문득 ‘오늘은 좀 어떠니’라고 묻는 아빠의 눈가 주름이, 지나치게 많이 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다시, 다시 -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 대학병원 한 번 가본 적 없던 내가, 사랑에 크게 울어본 적도 없는 내가, 지독한 복통과 열병을 경험한 것은 오히려 ‘살아가는’ 그 자체의 행복과 의미를 알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 나는 그가 하늘로 갔기에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사랑이 하늘로 갔는데, 어떻게 살 수가 있냐고. 그만 살고 싶어서 스스로 내 몸을 말렸다. 팔다리도 멀쩡했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고, 책과 꽃을 사랑할 줄도 아는 나였지만, 나를 버려 그에게 가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의 몫까지 웃으려 한다. 그의 몫까지 감사히 숨을 붙이고 걸어가려 한다.


지독하게 몇 주를 더 앓고 난 뒤에 나는 세상으로 나왔다. 우울증 약 대신 여러 운동을 시작했다. 다시 나온 세상은 전과 모든 빛이 달랐다.


 늘 어떤 사고로든, 십분 뒤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후회가 없는지, 내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사람들에게 오늘도 감사의 인사를 잘했는지 생각한다. 내가 나로서 풍부했는지 점검한다. 책과 초록을 사랑하는 내가 죽지 않고 오늘도 이 땅을 밟고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어쩌면 나는 두 사람분의 인생을 살 것이다. 누구보다 많이 보고, 많이 울고, 많이 웃을 것이다.



그 뒤로 매일 하늘을 보며 인사를 한다. 잘 있냐고.


 하늘은 매번 다른 빛으로 나에게 대답한다. 나도 매일 다른 빛의 나를 그에게 보인다.



같은 색의 하늘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무한개의 하늘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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