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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Jun 05. 2021

숲과 초록 책, 나라는 여자

초로로로로록


 여름! 하면, 초록 가득한 숲과 매미 소리, 그리고 수박이 떠오른다. 파란 바다도 빠질 수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여름에만 있는 것! 하면 아무래도 널브러진 수박 껍데기가 먼저고, 여름방학! 해도 바다의 기억보다도 산속 계곡과 외할아버지 집 앞 냇가에서 뛰어오르던 초록 개구리가 머릿속을 먼저 점프해 들어온다.


땀이 흠뻑 나고 난 여름날의 최고의 행복은 이런 거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살짝 덜 말린 머리 그대로 방바닥에 티 하나만 입고 눕는다. 선풍기를 튼다. 달콤한 수박을 송송 잘라 입에 넣는다. 내가 사랑하는 초록색 책들과 만화책을 쌓아놓고, 표지를 보며 흐뭇해한다. 느긋이 책장을 넘긴다. 누워서 뒹굴뒹굴 책을 보다가 지겨워지면, 영화를 튼다.


여름 안에 있어도 여름이 그리 울 때마다, <콜미바이유어네임> 혹은 <녹색 광선> 같은 영화를 본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초록 풍경들과 첫사랑, 방황하는 청춘의 뜨겁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지켜보는 일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초록으로 채색된다. 해가 질 때, 어스름히 보이는 순간의 진한 녹색 빛을 다시 보기를 기원한다. 나는 빌고 싶은 소원이 많다.


 상상만으로 여름이 심장 안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온다.

나는 요즘, 힘겨웠던 봄을 보내고 싱그러운 여름을 맞이할 채비 중이다.







 산책을 할 때 고개를 내리고 들며 내 주변의 초록을 감상한다. 발 밑의 작은 풀, 내 옆의 가로수,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반쯤 채운 산들. 마음이 찬찬히 가라앉는다. 시원해지고 안온한 최면에 걸린다. 햇살이 빛나는 오월의 일요일 오후 2시. 일주일 중 가장 초록 느낌이 짙은 시간이다. 어떤 시인은 한 여름의 초록이 부담스럽다 했다. 더 짙어질 녹음은 두렵다 했다. 딱 오월의 마지막. 혹은 유월의 시작. 육월이 아니라 유월이라고, 배려있는 발음으로 시작하기에 이미 더욱 다정한 계절, 지금. 당신과 내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순간. 한가롭고 따스한 분위기가 적당한 초록과 어우러져 있다. 이 모든 풍경이 그린- 하다. 청명하다.


 초록을 닮은 책들을 나는 아주 많이 알고 있다. 내 독특한 취미 중의 하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도서관에 가서 초록 책을 발굴하는 일이다. 아니, 도서관에 가는 게 뭐가 특이하냐고? 도서관에 가서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한다. 서가를 빠른 속도로 쓱- 훑으며 책들을 착착착 골라낸다. 한 번에 들 수 있는 권수는 여덟 권이 최대이다. 서둘러 책상에 놓고 비슷한 책들을 또 꺼낸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단아하고 선명한 초록색으로 표지가 이루어진 책들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싱싱한 수박 껍질이나 브로콜리의 색과 비슷하다. 개구리의 색보다는 조금 연해도 괜찮다. 풀잎의 색보다는 또 조금 진해도 나쁘지 않다. 그런 표지를 한 책은 엄청 많지는 않지만, 의외로 없지도 않다. 거의 모든 주제별 분류에서 나는 초록 책을 한 두 권쯤 만날 수 있다. 나무나 환경에 대한 책 중 초록 표지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의외로 그쪽 분야보다는 에세이나 여행, 인문학 분야 서적에 많은 초록색이 분포한다. 그 작가들은, 혹은 그 편집자들은 왜 초록색으로 책 표지를 정했을까.


 장난치듯 색으로만 골라낸 초록 책들은 의외로 엄청난 취향 적중률을 자랑한다. 정말이다. 당신은 아닐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까만 책을 골라냈을 때보다, 빨간 책을 골라냈을 때보다, 초록 책 다섯 권을 골라 들었을 때, 만족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책의 내용은 초록 표지를 닮아 있다. 오늘도 그렇게 초록 책을 열 권 정도 쌓아놓고, 책 탐색을 시작한다.




 일단, 표지 뒷면의 요약이나 추천사를 읽는다. 두 번째, 작가 소개나 작가 이력을 읽는다. 셋, 목차를 살핀다. 넷,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두세 쪽을 읽어 본다. 이 책은 합격. - 대출해 가거나 읽고 가겠다는 뜻이다- 이 책은 불합격. 음, 낮은 확률이지만 읽고 싶지 않은 초록 책들도 물론 있다. 그렇게 정성껏 다섯 권 정도의 초록 책을 내 마음의 뜰채로 걸러낸다. 사람들은 보통 한 공공도서관만을 이용하지만, 나는 서울 강남구와 성남 분당 일대, 그리고 용인 수지 지역의 거의 모든 도서관을 이용한다. 이 근방에서 늘 직장을 옮기고 거주지도 옮기다 보니, 당연히 대출카드도 다 있다. 매번 다른 도서관에 가서 새로 들어온 책과 바뀐 복도의 전시들, 사람들의 호흡이 섞여 달라진 도서관의 공기를 가늠하는 일은, 정말이지 일상의 큰 행복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못 발견했던 초록 책들을 아보카도 씨앗 빼내듯 기분 좋게 꺼내는 일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최근 나를 가장 가슴 뛰게 한 도서관은 양재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이층 테라스에 나서면 “내가 바로 초록이다!” 하는 느낌의 가로수들이 싱그런 향을 훅 내뿜는다. 나무와 양재천의 냄새를 코 깊숙이 빨아들인다. 근처 독립서점에서 새로 산 책의 새 종이 냄새도 킁킁 맡아본다. 행복하다. 가끔 나는 정말 책과 나무 한 그루만 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그렇게 만난 책들 중 좋아하는 책이 여럿 있는데 몇 권 소개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나라는 여자>라는 책이다.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작가님의 솔직함과 당당함, 이쪽 생각 저쪽 생각을 살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또렷하고 유머 있게 전하는 방식이 좋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척 독립적이고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방식이 좋다. 정말 내 마음과 똑같은데 차마 문장으로 깨끗이 표현해내지 못했거나,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내 마음을, 작가님께서 정갈히 써둔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작가님이 더 더 좋아진다. 작가님은 인기가 많다. 다른 사람들은 작가님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나와 무지막지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한다. 2013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딱 내가 집에서 독립할 시기였다. 하루키의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그 당시 독립한 나의 방까지 따라온 에세이 책은 이게 유일하다. 이사 간 집의 책장은 작고도 작았으니까. 다섯 번의 이사 동안에도 늘 곁에 있었다. 딱, 좋은 초록 색감의 표지와 나를 닮은 초록 글들을 방 한 구석에 놓고 있자면,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지금 있는 나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자신감과 안정감이 책 안에 있었달까.



 또 <빼기의 여행>이라는 책도 있다. 이 책은 정말 힘을 뺀 여행과 삶의 이야기여서 좋아한다. 나도 여행을 제법 많이 다녔다. 언젠가 한참 전에 내가 다녀온 여행지들을 남들처럼 세어봤을 때(이 행위에 큰 의미를 지금도 느끼지 못한다) 해외만 쳐도 60여 개국 90여 도시가 넘었다. 사람들은 제일 좋은 곳이 어디였냐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감동의 스토리를 듣기를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며 여행에 대해 물었었다. 그럴 땐, 뭔가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물론 엄청난 에피소드들이 많고 어마어마한 유명한 장소의 감동에 대해서도 해 줄 이야기는 많지만, 그런 순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소소하고 모자랐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게 나는 즐겁다. 송은정 작가님께서 누구나 꿈의 장소라는 우유니 사막이 가장 아름답고도 “지루한” 곳이라며 대놓고 말해주는 부분도, 기억에 남게 좋았다. 작가님, 여기 있어요. 그런 사람, 여기도 또 있어요! 아하하. 이상하게 거창한 순간보다도 처음 보는 사람과 무작정 걸었는데 계속 길을 잃었던 로마 골목의 벽의 풍경이라든가, 사이판 절벽을 앞에 두고 보았던 무덤에 적힌 내 이름 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가 있다. 작고 소중하고 별 것 아닌, 힘을 뺀 것들이 더 많이 사랑스럽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를 이룬다. 치유가 필요할 때, 빼기의 여행 중 일부를 읽고 일단 삶을 잠시 멈춘다. 힘이 난다. 더불어 이 책을 읽고 보게 된 최애 영화 <파리로 가는 길>도 다시 보며 모스카토 와인 한잔을 곁들인다. 그러면, 치유에 한 발 다가선다.



 쓰다 보니, 역시 초록 글은 힐링과 희망, 평안함. 그리고 여름, 여름의 야채들에 가까운 것만 같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있자면 공간과 나이 듦, 그리고 여백에 감사하게 된다. 초록 그림들과 함께 전원에서 사는 삶이 그리워질 때는, <매우, 초록>이라는 노석미 화가의 산문집이 생각난다. 또 그러다 배가 고파질 때는, 초록한 야채들을 사랑하다 못해서 콜리플라워와 아티초크로 만든 꽃다발을 선물 받고 싶다는 귀여운 그리너리 푸드 책, <오늘도 초록>을 떠올린다. 바질과 콩,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파스타가 먹고 싶어 진다. 얼음 동동 띄운 매실 에이드도 곁들여서.


 심심할 때는, <하루 5분의 초록>이라는 책을 꺼내서 식물 세밀화도 따라 그리곤 한다. 아, 고기리 계곡을 보면서 그림을 그려도 좋은데!  







 숲을 산책하는 일을 진짜 좋아한다. 아차, 하마터면 술을 좋아한다고 쓸 뻔했다. 물론, 그렇게 쓴다고 오타 일리는 없다. 고작 하나의 받침이 다른데 두 개 다 엄청 사랑스러운 글자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무와 풀이 예쁜 숲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좋아한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정말 숲과 사람이다. 양재천과 양재 시민의 숲을 수도 없이 걸었다. 여러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많은 짠-을 나누었으며, 그곳에서 수도 없이 많은 김밥과 하이네켄(최애 맥주이다)을 먹었다. 뛰다가 웃다가 울다가, 어린 시절에는 양재천에 살던 너구리 가족의 안부도 체크하면서, 나는 그렇게 자라났다. 제주의 사려니 숲도, 평창의 월정사로 가는 숲길도 힐링으로는 최고이지만, 내가 구석구석 녹아 있는 양재천만큼 내 안의 초록으로 자리한 곳은 없다.




 친구는 내게 ‘인류애’가 있다고 말했다. 사람을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숲에서 위로받듯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고 사람들과 힘을 나눈다. 물론 상처도 받는다. 하지만 각자의 안에 있는 ‘초록’과 ‘푸름’을 발견해서 연결되고 싶다. 평생을 인복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최근 연거푸 사람에게 다쳐서 힘들었다. 그래도 쉬이 사람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 스스로도 불완전하지만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고, 세상에 많은 반짝이는 초록 사람들을 앞으로도 많이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작은 나무도 큰 나무도 있고 종류도 꽃도 열매도 다양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나무와 숲의 물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어서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사랑스럽다. 최근에 받은 상처들을 회복하기까지 평소보다 꽤나 시간이 걸렸다. 많이 울고, 수도 없이 상담하며 지나간 장면들을 복기했다. 연극 수업에서는 미운 존재들을 향해서 허공에 대고 종이 공을 던지는 극을 실행했다. 개운했다. 이십여 권의 초록 책을 찾아 읽고, 대모산에 올랐다. 지금은, 양재천이 건너로 보이는 한 카페에 앉아 있다. 내 뒤로는 초록 꼭지가 넘실거리는 딸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딸기로 한 벽을 인테리어 하고, 혹은 딸기 한 묶음을 잎과 함께 꽃병에 그 채로 아 두는 인테리어에 감탄한다.


 양재천 길의 카페들은 그렇게 한가롭고 다정하다. 눈앞으로는 건물 이층보다 큰 초록한 가로수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어폰을 꼽고 보아의 “그린라이트”를 재생한다. 한 숨을 내쉰다. 스쳐 가는 인연도 많지만, 나는 초록불을 켜고 그린라이트 안에 머문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상처 받겠지만, 스스로를 초록빛으로 채색하며 자라나고 재생할 것이다. 세상의 나무들이 지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 아름다운 양재천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도 나의 초록으로 존재하며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 힘든 주간을 잘 버텨냈으니, 스스로에게 초록 원피스를 하나 선물하러 가려한다.




 마음의 잎사귀들에 새 살이 차오를 시간이다. 파란색이 최애 색이라면, 초록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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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抄錄

각종 서적이나 기록 등에서 필요한 것만을 뽑아 기록하는 것.


초록 [Green, 草綠]

노랑과 파랑의 중간색으로 스펙트럼의 파장 520nm 윗부분의 색. 2003년 색 이름 개정에 의해 녹색의 색명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평화와 안전, 중립을 상징하며 우리 눈에 가장 편안함을 주는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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