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한국에서요
어렸을 때 나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에 들었다. 그네를 타다가 잠들기도 했고, 밥 먹다가 잠들기도 했고, 소파에 상체만 올려놓은 반쯤 선 기이한 자세로 잠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졸린 학생들에게 서서 수업 들으라고 교실 뒤에 설치 해 둔 스탠딩 테이블에서도 잘 잤다. 어이 없다는 듯이 소리치시던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자라야, 너는 서서도 조니?"
[나의 기이한 잠자기 쇼]
성인이 된 지금도 친구들과 놀러가서 밤새 수다를 떨다가 졸리면 혼자 침대에 들어간다. 파티룸에서 몇 시간 째 노래방 기계로 열창을 하는 친구들을 배경음악 삼은 채 잠든 적도 있다. 지하철에서도 손잡이를 손에 기대어 서서 자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덮어놓고 잘 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또 오산이다. 불면증은 또 다른 나의 반려질환이었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불면증이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곤히 자고있는 새벽마다 혼자 깨서 조용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청소년 관람 불가 애니메이션을 시청했다. 요즈음에는 애니메이션에 잔인한 장면이 으레 나오곤 하지만, 당시에는 이X야샤나 강철의 XX술사 같은 작품들을 밤 시간에만 방영했던 것 같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시간대에 방영된 것은 2005년이었고, 내가 7살일 때였다. 특별히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서 잠에서 깬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어릴 때 가지고 있었던 천식 때문에 깊게 잠을 자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초등학생 때는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 내려진 벌처럼 느껴졌다. 밤의 어두움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잠들지 못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는 밤마다 울면서 잠을 자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침이 되면 거짓말처럼 어제 잠들었다는 것이 기억나서 뿌듯했고, 결국엔 잠을 잤으므로, 굳이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이 반, 딴짓하는 학생이 반이었으므로 수업시간에 조금 졸고 있다고 크게 혼내거나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밤에는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처음 생긴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하느라 바빴지만, 다음 날 점심시간에 자야지, 생각하며 새벽까지 랜선 데이트를 즐겼다.
오히려 고등학생이 되어서가 문제였다. 특목고에 진학한 나에게 아침부터 새벽까지 매일 공부해야 하는 일정은 피로보다는 졸음이 고역이었다.
특히 야자시간. 매일 6시 50분부터 12시까지는 야간자율학습시간이었다. 그러나 자율학습에 자율로 참가하지 않는 학생은 없었다. 그 학교에는 오로지 야자를 위해 학년별, 성별로 나눠진 학습실이 있었다. 학습실에는 독서실 책상이 개인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허벅지도 꼬집고, 졸음깨는 껌도 먹고, 잠을 깨는 새싹 댄스도 만들어 추고, 달달한 간식도 먹어봤으나 나는 그냥 졸렸다.
그러나 막상 기숙사에 들어가 12시 40분의 소등 시간이 지나면 잠이 안 왔다. 청개구리 같은 수면 스케줄에 화딱지가 났지만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한민국 고등학생 특유의 입시 걱정과 오늘 풀지 못한 숙제들이 생각나면 그날 밤샘은 확정이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수면문제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평균 5시간 정도 잤는데, 그 말은 1~2시간만 자는 날도 있고 12시간 자는 날도 있으며, 주로 3~4시간 정도 잔다는 말이었다. 공부할 양이 많기도 했으나, 공부가 하기 싫으면 게임을 해서라도, 일을 해서라도 새벽까지 지새웠다. 덕분에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은 졸지에 올빼미 생활을 함께 하게 되었다. 학생회실과 물리학과 세미나실에서 같이 밤새워 준 친구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보낸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한 덕에 매 학기 룸메에게 묻는 첫 질문은 "너 혹시 알람 잘 듣니?" 였다. 다행히 대학교 때는 알람을 잘 못 듣는 룸메를 만나 3년 동안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나는 정말로 알람을 잘 못 들었다. 알람을 끄고 다시 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시간 동안 귀 바로 옆에서 핸드폰 알람이 최대 볼륨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어도 무시하고 잘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덕분에 휴학하고 회사에 다니기 위해 본가에서 살았던 한 학기 동안 가족들이 크게 고생했다. 새벽에 노래는 시끄럽게 울리지, 애는 안 일어나지, 몇 분 뒤에 또 울리지.
"얘, 넌 알람을 도대체 몇 개 맞추는 거니?"
알람을 잘 못 들어서 일어나기 힘들다는 문제로 심각하게 수학 선생님께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자면서도 긴장하고 자야지"라는 뇌과학자들 비명지르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푹 자면 안된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주입하자, 놀랍게도 2~3개월 쯤 지났을 때 정말로 잠을 깊게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가끔 꿈을 사람도 있고 전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매일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깨고 나면 꿈과 현실의 분간이 잘 되지 않아 멍하니 몇 분 씩 앉아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매일이 피곤하고 졸렸다.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고 나면 오히려 이상했다.
자고 일어나는 게 어려운 건 뇌 각성이 잘 되지 않는 ADHD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덜 억울했을까?
불면증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책이고 인터넷이고 가릴 것 없이 '잠에 쉽게 드는 법', '빨리 잠드는 법', '잠이 안 올 때'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고 직접 시도해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면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잠은 '철저한 훈련'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특히 당신이 ADHD인이라면 더 그렇다.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다.
(* TMI지만 우리 집 개는 진짜로 풀을 뜯어먹는다. 증거 영상이 있으니 궁금하면 저에게 메일 요망)
특별한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글과 정보는 인터넷에 무수히 많이 있으므로. 다만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가 수면 교육을 해주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도 그럴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가장 크게 효과를 본 방법은 낮에는 콘서타(ADHD 환자가 먹는 각성제)를 먹고, 밤에는 수면제를 먹는 것이었으며, 둘 다 정신과 선생님의 권고로 장기간 복용했다. 하지만 요즘은 수면제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의사는 내가 먹는 수면제에는 의존증도 부작용도 거의 없기 때문에 계속 복용해도 무방하다고 했지만, 기분이 그냥 뭐시기 하다는 이유로 끊어보려고 하고 있다.
두 번째로 효과를 보는 방법은 <계단 내려가기> 수면법이다. 물론 이름은 내가 만들었으니 어디 검색해도 안 나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잠>인지 <기억>인지 둘 중 하나에서 나온 전생 체험을 하는 방법인데, 실제로 작가 본인조차 시도해봤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그 소설을 따라한답시고 계단을 상상하다가, 계단만 상상하면 잠이 오는 현상을 발견하고 곧바로 써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이제 원할 때 꽤 잘 잔다.
눈을 감고 10개의 계단을 내려가는 상상을 한다. 아래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생의 순서대로 방문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중에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희망하는 전생의 방에 들어간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뭔가를 상상하는 것이 잠 자는데 도움이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도넛 연상하기' 같은 이름이었는데, 도넛의 모양, 질감, 색, 촉감, 냄새 같은 특성들을 하나씩 아주 자세히 연상하며 집중하는 방법이었다.
계단 내려가기 수면법도 마찬가지로, 요점은 계단을 아주 자세히 상상하는 것이다. 나무 계단도 좋고, 철 계단도 좋고, 푹신푹신한 매트가 깔려있는 계단도 좋다.
여전히 나는 잠에 잘 못 들고,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잘 못 일어나지만, 다년 간의 노력 끝에 해 떠 있을 때 생활하고 해지면 자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26년째 인생에 시차적응 중이지만, 언젠가 남들처럼 대략 잘 자고 대략 잘 일어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