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천천히 나와, 아니 10분만

혹시 출발했어?

by 김자라

미리 말해두지만 변명하려는 건 아니다.



ADHD의 가장 주요한 증상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에 꼽히는 게 '지각'일 것이다.


학창 시절, 나는 지각해도 생활기록부에 기록하기 보다는 엎드려뻗쳐나 앉았다 일어나기로 대체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공식 지각자로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튼튼한 다리 근육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거대한 지각을 하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5분, 때로는 10분, 대부분은 아슬아슬하게 1, 2분을 다투는 지각이었다.


학교와 회사는 꼬박꼬박 나갔지만, 그 외에는 지각하는 상황이 부끄러워서 '안 가기'라는 옵션을 선택한 적도 많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그룹 PT 수업을 예약해놓고 늦을까봐 안 갔다. 1시간 뒤에 예약하는 다음 수업도 예약했으나, 버스를 타고 갔더니 이미 수업이 시작된 후라서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이게 당연하고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각은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므로 최대한 피하고 싶다. 그렇지만... 지각하는 데에 굳이 이유를 대보자면 이렇다.


의외로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다. 계획 세우는 것도 좋아하고, 계획한대로 일정을 마치고 체크리스트에 V표시와 빨간 줄을 긋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내가 계획이 흘러가는 시간과 실제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이 문제다.

나는 내일 9시에 친구와 약속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넉넉하게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일어나기로 했다. 30분 준비하고 30분 동안 약속 장소로 이동하면 되는 완벽한 플랜을 세웠다. 전날 머릿속으로 준비하는 시뮬레이션까지 했다.

마침 딱 8시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5분 정도 밍기적거리긴 했으나 그 정도의 여유는 있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고 시간을 보니 아뿔싸, 8시 25분이다. 아, 그런데 오늘 사진을 찍기로 해서 화장을 아얘 안 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5분 만에 화장을 마친다. 8시 33분쯤 허겁지겁 달려간 정류장 전광판에는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이 10분 남았다는 알림이 뜬다. 하는 수 없이 친구에게 출발 했냐고 문자한다. 친구야 5분만 천천히 나와, 아니 10분만.

간단하게 예를 들었지만, 여러 일정이 얽힌 매일매일의 삶을 살다보면 상황은 더 복잡하다. 내 계획은 다 어그러지고 꾸겨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지각의 변명이 된다.


세상에는 변수가 많다. 그 변수를 모두 고려하며 살 수는 없으나, 내 반려질환은 스스로 세운 계획을 과맹신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 문제다.

백수가 된 요즘은 매일 아침 할 일을 적어 친구에게 보내는데, 한 달 동안 전부 완수한 것은 2일 정도다. 내가 하루동안 얼마나 일을 하고,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26년째 내 몸뚱아리와 내외하는 느낌이다.


언제쯤 계획한 대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침 준비 꿀팁


혹시 아직 아침 루틴이 힘든 성인 ADHD가 있다면 이 꿀팁을 전해주고 싶다. ADHD 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쓴 어떤 책에서 읽은 꿀팁이다. (안타깝게도 책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


당신이 7시에 일어나야 한다면, 우선 6시에 알람을 맞추자. 그리고 머리 맡에 물과 콘서타를 둔다. 6시에 일어난 당신은 평소보다 일찍 깨서 기분이 좋을수도 있고, 나쁠수도 있다. 좌우지간 머리 맡에 둔 콘서타를 먹어라. 그리고 1시간 더 자고 평소처럼 일어나시라.


콘서타는 섭취한 뒤 1~2시간 내에 최내 최고 혈중 농도에 도달한다고 한다. 약이 전두엽을 억지로 깨워줄 때까지 1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소리다. 당신은 그 동안 자면서 기다리면 된다. 일어나자 마자 아침 루틴에 집중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다른 약은 내가 안 먹어봐서 모르겠으니 담당 의사분께 문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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