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이라는 단어가 모든 불안과 우울증, 질병을 없애주는 특효제라도 되는 듯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매일 꾸준히 먹으면 모든 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만병통치약처럼 말이다. 그에 따라 ‘긍정 심리학’이 주목받았고, ‘긍정의 힘’을 어필하는 책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사실 긍정적인 사람 옆에 있으면 부정적인 사람 곁에 있을 때보다는 확실히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의기소침할 때, 그 일을 꼭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고 자신감이 없을 때, 막연한 불안감으로 인해 안절부절못하고 쉽게 동요될 때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진통제라도 맞은 듯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통제도 정해진 투여량 이상 맞으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듯이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 역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할 때가 있다. 특히 대책 없이 긍정적인 사람이 문제다.
주목할 점은 어디에나 한두 명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긍정 주사’를 맞고 났더니 진정이 되는 듯해서 생각을 정리할 겸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긍정 주사 괜찮지?”라며 대용량 주사를 한 대 더 들이댄다면 곤혹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얘기도 귓가에 대고 계속 부는 나팔 소리라면 “제발 저리 좀 꺼져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가뭄에 단비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면 진창을 만드는 법이다.
한순간도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너를 작게 줄여서 주머니 속에 항상 넣고 다니면 좋겠어.
연애 초반에야 이런 달콤한 속삭임이 사랑의 증표가 될 수 있지만, 결혼 후 10년, 20년이 흘러도 매일 이런 말을 하고, 상대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요구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것은 더는 달콤한 속삭임이 아닌 무시무시한 선전포고가 되고 만다.
실제로 이런 갈등 때문에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과도한 애정은 집착을 부르며, 결국 의부증이나 의처증 같은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안쓰럽게 여기고 도우려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표현의 정도가 지나치면 고마움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에게 비참함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전라남도 교육청에서 정리한 장애인 에티켓에 관한 내용을 보면 “장애인을 도와주기 전에 반드시 먼저 물어보라!”라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장애인들이 일반인과 같은 직장에서 일할 때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업무가 아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시선이라고 한다. 돕고 싶은 마음에 자주 쳐다보고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이는 일은 대신해주려는 착한 마음이 오히려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마음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진심이 왜곡될 수 있다.
그런 오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친구 모임에 나갔더니 회사 자랑, 연봉자랑만 실컷 하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이런 것이라면, 과연 ‘내 처지를 헤아려줘서 고마워’라는 생각이 들까. 절대 그렇지 않다. 십중팔구 ‘나중에 누가 더 잘되는지 두고 보자. 오늘 받은 수모는 그때 몇 배로 갚아주마’라며 굳은 각오를 다질 것이 틀림없다.
착한 것도 지나치면 문제다. 설령, 그 시작이 아무리 순수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말도 상대를 봐 가며 적당히 해야 빛을 발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듣기에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다.
무엇이건 적당한 선에서 멈출줄 알아야 한다. 흔히 우리가 ‘센스 있다’, ‘상식이 통한다’, ‘매너 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선을 확실히 지킬 줄 안다. 눈치 없이 들이대다 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과 편안함을 위해 확보하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공간마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한 것, 고마운 것, 의지가 되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친절과 지나친 관심,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뿐이다. 나아가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의 부족함만 부각한다.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배려하려면 그 보이지 않는 선을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부디, 센스를 발휘한다면서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