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성이 전신 통증과 무기력증을 호소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없어 일이고, 가족이고, 만사가 귀찮았다. 그녀의 불평불만을 매일 들어야 했던 가족들은 그녀의 병을 ‘갱년기 우울증’이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가족들도 그녀가 처음 증상을 호소했을 때는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니냐며 크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검진 결과, ‘아무 이상 없다’라는 말을 듣자, 병명도 없이 늘 통증을 호소하는 그녀에 대해 걱정보다는 귀찮은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녀가 아무리 통증을 호소해도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다.
나이 들면 다 그래. 그러니까 세 끼 꼬박꼬박 먹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봐. 운동이 최고라잖아. 나이 오십 될 때까지 숨쉬기 운동만 하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라도 매일 등산, 에어로빅, 수영 같은 걸 좀 해보는 게 어때? 매일 아프다며 누워 있지만 말고.
그녀는 가족들의 그런 반응에 몹시 서운함을 느꼈다. 아니,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배신감과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해왔던 집안일을 대신 도맡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같이 가 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말도 꺼내기 전에 “운동이나 해!”라며 쐐기를 박는 가족들에게 더는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친구가 유명한 한의원을 소개해주었다. 역시 유명한 한의원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원장의 말 한마디가 누구도 치유하지 못했던 그녀의 증세를 급격히 호전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특별한 비법이랄 것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고,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 한마디를 해줬을 뿐이다.
지금은 운동도 독이 되니 조심하세요.
이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가장 필요한 위로이자 약이었다. 평생 운동과 상관없이 살아온 그녀가 혼자서 등산화나 운동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운동해야 한다”라는 가족의 조언을 이성적으로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가족의 운동 권유가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럴 때 “기혈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몹시 쇠약한 상태라서 갑작스러운 운동도 몸에 큰 무리가 될 수 있으니, 심하게 움직이지 말고 잘 먹고 잘 쉬면서 편한 마음으로 지내라”라는 한의사의 한마디는 큰 위로가 되었다.
위로란 ‘상대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상대의 상황이나 감정, 욕구를 정확히 파악해 원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내가 지금 어떠어떠한 말로 위로받고 싶으니 그런 말과 행동을 해달라고 절대 표현하지 않는다.
위로의 핵심은 내가 말하기 전에 상대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데 있다. 자기가 먼저 현재의 문제나 상황을 설명한 후 그에 대한 전문가의 대답을 듣는 것을 우리는 위로라고 하지 않고 상담이나 처방, 진단이라고 한다. 상담, 처방, 진단은 의학적이고, 객관적이며, 논리적이다. 그러나 위로는 편파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나를 좀 봐 달라’, ‘내 상황과 처지를 이해해 달라’, ‘내 감정에 공감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욕구에 전문가도 아닌 우리가 굳이 처방하거나 진단할 필요는 없다. 아니, 정답을 줘서는 안 된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 역시 그 정도의 뻔한 해답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랬구나’라는 공감이 가장 필요하다.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상대는 ‘내 편이 되어 달라’라며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때 어떤 위로를 해야 하는지,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라. 해줄 조언이 없다고 ‘못 들은 척’, ‘못 본 척’해서도 안 된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신호가 감지되면 즉시 그에게 다가가라. 그리고 그의 말을 잠자코 들어줘라. 아무 말 없이 그저 잠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충분히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약이 되는 위로란, 답을 대신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귀 기울여 말을 들어주고, 불안과 괴로움, 걱정을 고민으로 인정해주며 “이해해”, “그럴 수 있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한편임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큰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