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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Aug 11. 2020

순수시의 대가, 김영랑의 신인 작가를 향한 조언




◆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


김영랑은 김소월과 함께 우리 시문학사를 대표하는 서정시인이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김소월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평안도 방언을 사용해 민요적 감각의 시를 썼다면, 김영랑은 찰지고 착 감기는 전라도 방언을 사용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겄네> 중에서


명절을 준비하느라 바쁜 누이에게 걱정하지 말고 단풍의 아름다움을 즐기라는 이 시의 묘미는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맛깔스러운 전라도 사투리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의미와 뉘앙스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그 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읽으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을 것이다.  


1903윤식이라는 본명으로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랑은 휘문의숙에 시절 정지용의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 후 평생의 벗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창간을 주도했고, 《시문학》창간호에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김영랑의 등장은 당시 문단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의식을 주로 다뤘던 경향시가 유행하던 때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서정시의 묘미를 보여줌으로써 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같은 시문학 동인인 정지용의 감각적 기교와 함께 순수시의 극치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는 1935년 출간된 그의 첫 번째 시집 영랑시집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 대표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중에서   


하지만 그가 순수시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기러기, 거문고, 묘비명등의 시를 통해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냈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정치에 투신하는 등 그때까지 그가 보인 행동과는 달리 사회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서정시의 묘미를 선보인 김영랑.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우리 시문학사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다.



◆ 후배 문인들을 향한 당부… “문학의 생명은 진실함! 진실함이 깃든 글을 써라”


맑고, 깨끗한 시어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하며 순수시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던 현대시의 거장 김영랑은 후배 문인들에 대한 조언 역시 아끼지 않았다. 특히 글로서 밥을 먹고 살고자 하는 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문학은 진실함에 그 가치와 생명이 있다.
과거의 위대한 작품 중 아직까지 후세에 전하는 것은 모두 작품으로서 진실하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문학과 인생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말한다.
따라서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나 철학을 담은 작품이라도 만일 그것이 인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태도를 담고 있지 않으면 가치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는 오랜 글쓰기와 변화무쌍한 삶을 겪으면서 깨달은 그만의 글쓰기 원칙이기도 했다.




요즘 문단에는 진실한 작품을 쓰기보다 사교로서 문명(文名, 글을 잘해서 드러난 명성)을 올리려는 이가 적지 않다.  

신인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문인의 생애가 묻어 있어야 하며, 글 한 구, 글 한 편에 각기 생명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성작가를 능가할 만한 작품을 씀으로써 신인 된 패기와 실력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와 땀이 섞인 노력과 파도와 같은 정열, 바다와 같은 끈기가 필요하다.

나아가 문학의 생리를 벗어난 일체의 행동은 자신의 문학을 그릇되게 하는 동인(動因,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작품에 노력과 정열, 끈기를 송두리째 바치지 않고 발표욕과 고료에 먼저 눈이 번쩍인다면 이는 그나마 맥맥히(마음이나 가슴이 기운이 막혀 답답하게) 흐르는 조국 문단의 맑은 흐름을 너무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신인을 육성해야 하는 기성의 책임이 막중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기성은 작품을 보는 엄정한 눈을 딴 곳에 쏠린 나머지 신인을 자신만의 세계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인을 아끼는 태도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인을 아끼는 마음이 역효과를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름지기 신인은 겸허한 마음으로 인생을 진실하게 바라봄으로써 위대하고 가치 있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어야 하며, 첫째도 글공부, 둘째도 글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요(要)는 문인의 조국은 문학에 있다는 말처럼 문인은 문학, 특히 작품에 의해서 평가된다는 사실을 절대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에 대한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문학운동을 배격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붙잡고 나아가야 할 문학을 위해서라면 찬언(贊言, 도움의 말) 역시 아끼지 않아야 한다. 다만, 문학의 생리에서 벗어난 행동과 문단정치는 문학생활과 그 수명에 플러스가 되기보다는 마이너스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직도 출세를 바라는 신인이 있는가? 그렇다면, 시인의 경우 평생을 자신할 수 있는 시 50편쯤은 갖고 나오라. 또 소설가라면 단편 10편, 장편 5편은 완필해 가지고 나와야 할 것이다.   

신인이여, 자중하라!

─ 김영랑, <신인에게 주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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