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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Sep 19. 2020

한국문학사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 춘원 이광수의 ‘참척




◆ ‘참척’의 아픔을 겪은 춘원 이광수… 일 년여에 걸쳐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3월 어느 날 밤, 한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여덟 살 아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아직도 문소리가 날 때마다 혹시 네가 들어오는가 싶어 고개를 돌린다. 큰길가에서 전차와 자동차를 보고 서 있지는 않은지, 장난감 가게에서 갖고 싶은 장난감을 못 사서 시무룩하게 서 있지는 않은지, 대문간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딱지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 (중략) … 하지만 아침 상머리에 네가 없음을 알고, 아빠는 눈물이 쏟아진다.”


춘원 이광수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큰아들 봉근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 년 동안 쓴, 부치지 못할 편지의  일부로 그의 애끊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다. 친일 행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는 그 역시 참척의 아픔만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봉근은 춘원 이광수와 두 번째 아내 허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이광수가 43세이던 1934년, 여덟 살에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다. 이에 이광수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일년 여에 걸쳐 아들에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쓴다.  



▲ 1928년 경에 찍은 춘원 이광수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봉근, 아내 허영숙, 춘원 이광수.(사진 출처 ㅡ 민음사). 오른쪽은 아들 봉근이 일곱 살 무렵에 찍은 사진.



◆ 한국문학사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 춘원 이광수…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춘원 이광수. 그만큼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도 없다. 알다시피, 그는 우리 현대문학의 실질적인 기초를 다진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문장이 매우 쉽고, 매끄러우며, 어휘 역시 풍부하다. 특히 일반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단어를 절묘하게 사용해서 주옥같은 문장을 엮어냈다. 그 결과, 문학의 대중화를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3·1 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된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거기까지였다면 그는 현대문학의 개척자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문학의 어른으로서 충분히 존경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변절하고 말았다. ‘민족개조론’ 등을 앞세우며 친일파라는 오명을 남긴 것이다. 과연 그는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독립 후에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하고 카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 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을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한 것이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만,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말하지 않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ㅡ 이광수, <나의 고백>  중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정당화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하고, 불쾌해한다. 실례로, 몇 년 전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다고 해서 말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철회되고 말았다. 평론가 김현의 말마 따나, 이광수라는 이름은 아직도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임이 틀림없다.  



▲ 변절 후의 춘원 이광수(사진 왼쪽)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광수의 모습. 



◆ 가슴 밑바닥까지 저미게 하는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정


몹시도 사랑하던 아들 봉근이 죽자, 춘원 이광수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에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하는 등 여느 아버지 못지 않은 참척의 아픔을 겪는다. 아들이 살아 있을 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자신을 못난 아비라고 일컫기도 했다.

<봉아와의 추억>은 그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편지 형식의 글로 일 년여에 걸쳐 쓴 것으로, 가슴 밑바닥까지 저미게 한다.   




봉아(鳳兒, 봉근의 아명)야!  

네가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구나. 나는 아직도 문소리가 날 때마다 혹시나 네가 들어오는가 싶어 고개를 돌린다. 큰길가에서 전차와 자동차를 보고 서 있지는 않은지, 장난감 가게에서 갖고 싶은 장난감을 못 사서 시무룩하게 서 있지는 않은지, 대문간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딱지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금방이라도 네가 “엄마, 엄마, 엄마”하고 뛰어 들어올 것만 같구나. 

… (중략) …   

아아, 내 아들아! 너를 잃은 슬픔으로 어리석어진 이 아비는 아직도 네가 영원히 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구나. 금방이라도 대문 밖에서 혹은 아랫방에서 혹은 건넌방에서 또 혹은 뒤꼍에서 “아빠, 아빠”하고 성큼성큼 뛰어나와서 내 어깨에 매달릴 것만 같구나. 

… (중략) …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야 내가 너를 매우 사랑하고 아꼈음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부디,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여라.  

… (중략) …   

봉근아! 이 아비는 열한 살에 부모를 여윈 후 사십여 년 동안 형제·자매·자녀는 막론하고 육친의 정을 전혀 모르고 살다가 너를 본 지 육 년 팔 개월 동안 비로소 혈족에 관한 정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너는 나를 매우 사랑하고, 따랐으며, 의지했다. 나는 사내라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너를 친구처럼 믿고 사랑했다.  

… (중략) …   

너를 ─ 그 어리고 약한 것을 때리던 내 손은 저주받을 것이다. 너를 슬프게 하고, 성나게 하는 말을 하던 내 입도 저주받을 것이며, 내가 편하기 위해 너를 귀찮게 생각하던 내 마음 역시 저주받을 것이다. 

… (중략) …   

바람 없고 볕 따뜻하던 날, 네가 남암 주지의 등에 업혀서 처네(어린아이를 업을 때 두르는 누비로 된 이불)를 펄렁거리며 가물가물 동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산국화가 많이 핀 등성이에 나와서 바라보았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고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에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내 남은 목숨을 모두 저 아이에게 주시옵소서!”  

… (하략) …

ㅡ 이광수, <봉아의 추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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