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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와 국내 첫 女의사 허영숙의 러브 스토리

by 마테호른




◆ 유부남, 이광수와 일본 유학 중 만나 금지된 사랑을 했던 당찬 신여성 허영숙,

국내 최초의 女의사이자, 최초의 의학전문기자로도 활동…



▲ 일본 유학 시절의 허영숙과 노년의 허영숙. © 사진 출처 ㅡ 추후 표기



“오늘 140원 부친 것 받았을 줄 믿소. 그리고 기뻐하셨기를 바라오. 그걸로 양복 지어 입고, 40원으로는 3월 학비 하시오. 나는 학교에서 참고서를 많이 사줘서 그것만으로도 몇 달 공부 거리는 될 것 같소.”


춘원 이광수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두 번째 부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다. 여름에는 '렌코트'(레인코트)가 필요하니 값을 적어 보내라며 부인을 살뜰히 챙겼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춘원 이광수는 열아홉 살 때, 집안 어른들의 강요로 백혜순이라는 여자와 첫 결혼을 했다. 아버지 친구의 딸이기도 했던지라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도쿄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중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지만, 첫날밤부터 후회를 했다고 한다.

얼마 후,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이광수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운명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가 바로 허영숙이었다. 당시 허영숙은 일찌감치 ‘신여성’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진명소학교, 경기여중을 거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1918년 10월,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로 의사 시험에 합격할 만큼 능력 있고, 당찬 여성이었다.

문제는 이광수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광수와 허영숙의 만남은 금지된 사랑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광수가 이혼하기로 결심하지만,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조강지처를 버리는 일은 크게 지탄받아 마땅했다. 그런데도 이광수는 부인 백혜선과 이혼한 후 허영숙과 중국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고, 이광수가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후인 1921년 5월 결혼했다.

한편, 베이징 도피생활 중에도 의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던 허영숙은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 부근에 ‘영혜의원’을 개업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개업의였다. 아울러,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남편 이광수가 병으로 앓아누었을 때 업무를 대신하다가 기자가 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한 셈이다.


▲ 이광수의 가족 사진. 아들 봉근, 아내 허영숙, 춘원 이광수. 아들 봉근은 여덟 살에 사고로 죽고 말았다. © 사진 출처 ㅡ 민음사




제8호
3월 17일 밤

이렇게 혼자 건넛방에 앉아서 당신께 편지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외다.

오늘 11일에 부친 편지를 받았소. 이레 만에 왔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여 병원에 못 간다니 심히 염려되며, 내가 첫 편지를 5일에 부쳤는데 그것이 11일까지 아니 갔다고 하면, 필시 중간에 무슨 잡간(검열?)이 있는 모양이외다. 제8호까지 누락 없이 다 받았노라고 자세히 회답하시오. 건강이 근심되어서 곧 전보를 놓으려고 하였으나 그러면 놀란다고 어머님이 말리셔서 못 놓았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잘 지내니 안심하고 즐겁게 공부하시오.

오늘 140원 부친 것 받았을 줄 믿소. 그리고 기뻐하셨기를 바라오. 그걸로 양복 지어 입고, 40원으로는 3월 학비 하시오. 나는 학교에서 참고서를 많이 사줘서 그것만으로도 몇 달 공부 거리는 될 것 같소.

모레부터는 아주 집을 헐어 역사(役事, 토목, 건축 따위의 공사)를 시작할 터이니, 약 40일간은 공부할 기회도 없을 것 같소. 그러니 내 책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애도 쓰지 말고, 아주 마음 터놓고(편하게) 지내시오.

5삭(朔, 월)부터 매달 학비를 60원 보내리다. 그리고 여름 양복값도 보낼 테니 얼마나 들지 회답해주시오. 공부하는 중이니 저금은 하지 않아도 좋소. 학비가 곧 저금이오. 여름에는 렌코트(레인코트) 같은 것이 있어야 할 터이니 모두 값을 적어 보내시오.

내 매달 수입은 분명히(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학교에서 80원 또는 100원, 《개벽》에서 30원 또는 50원, 《신생활》에서 40원, 만일 《동명》이 나오면(확실히 나온다오) 거기서 80원 또는 100원은 될 것 같소. 가장 적게 잡더라도 150원은 될 것 같으니, 당신 학비와 내 책값, 담배값은 군색하지 않을 듯하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공부하길 바라오.

봄에는 금강산에 갈 수 없으니 아마 6월 그믐께나 가게 될 듯하오. 당신은 7월에나 돌아올 터이니……

《개벽》 3월호는 부쳤소. 3월호가 재판(再版, 이미 간행된 책을 다시 출판함)에 들어갔는데, 내 글이 호평이라고 하니 기뻐하시오!

《신생활》은 성태 군이 직접 부친다고 하오. 내 글을 떼어 모으는 직분을 게을리 마시오. 바요링(바이올린) 책과 모포는 곧 보내리다.

ㅡ 남편


※ 아래 브런치를 참조하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ookceo/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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