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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Sep 15. 2020

이상이 가장 흠모했던 시인에게 쓴 7통의 편지




▲ 시인 이상(사진 오른쪽)과 이상이 가장 흠모했던 시인 김기림. 김기림은 낯을 심하게 가렸던 이상이 ‘호형호제’ 했던 몇 안 되는 친근한 벗이기도 했다.



◆ 이상이 가장 흠모했던 시인 김기림… 

    낯을 심하게 가렸던 이상과 ‘호형호제’ 했던 몇 안 되는 친근한 벗


시인 김기림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지주의(지성 또는 이성이 의지나 감정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상의 입장)’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문학적 능력은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하는 작가와 그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도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알려진 작가로는 백석, 정지용, 이상 등이 있다. 특히 이상과는 그렇게 해서 인연을 맺은 후, 이상이 죽을 때까지  ‘호형호제’할 만큼 가깝게 지냈다. 낯을 심하게 가렸던 이상에게 있어 김기림은 몇 안 되는 친근한 벗이었던 셈이다.  


1936년 11월부터 이듬 해 3월, 사망할 때까지 이상은 일본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조선에는 없는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큰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의 그런 바람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상이 당시 일본 동북제대에 유학 중이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 이상과 흉물 없이 지냈던 벗들. 대부분 내성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유정, 이상, 김기림, 박태원. © 사진 출처 ㅡ 월간조선



◆ 일본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리던 이상, 김기림에게 7통의 편지 남겨… 


일본 방문 전후로 이상은 김기림에게 7통의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일본 방문을 전후로 그 내용이 크게 다르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을 방문하기 전의 편지 내용이, 김기림의 안부와 동료 문인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감 가득한 가의 각오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일본 방문 후에 쓴 편지는 대부분 외로움을 호소하며, 지독한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워밍업이 다 되었건만, 와인드업을 하지 못하는 이 몸은 형이 몹시 부러울 뿐이오. 

… (중략) … 

지용(시인 정지용), 구보(소설가 박태원), 다 가끔 만나오. 건강하게 잘들 있으니 또한 천하는 태평성대가 아직도 계속될 것 같소. 환태(문학평론가 김환태.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와 결혼함)가 종교 예배당에서 결혼하였소.

ㅡ 일본 방문 전인 1936년 10월 초에 쓴 편지


─ 봐서 내달 중으로 경성으로 도로 돌아갈까 하오. 여기 있어 봤자 몸이나 자꾸 축나고 겸하여 머리가 혼란하여 불시에 발광할 것만 같소. 첫째, 이 가솔린 냄새가 미만(彌蔓, 널리 퍼짐) 넘쳐흐르는 것 같은 거리가 참 싫소.

ㅡ 일본 방문 후인 1936년 11월 29일에 쓴 편지


당시 김기림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이상이 죽기 얼마 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안타까웠던지 김기림은 이상이 돌연 죽자, 그와의 추억을 담은 추도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箱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기거(起居)도 바로 못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은 상아(象牙)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염이 코 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어두운 표정이 가뜩이나 병들어 약해진 벗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나는 애써 명랑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故 이상의 추억〉 중에서


그러면서 이상에게 좀 더 살뜰하게 대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이상이 없는 현실을 한없이 슬퍼한다. 그런 감정은 그의 시 <바다와 나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ㅡ 김기림, <바다와 나비>


<바다와 나비>는 김기림이 이전에 쓴 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국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낯선 외래어도 없을뿐더러 서구 문명 세계에 대한 동경도 없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슬픔과 생의 질곡이 느껴진다. 그는 과연 무엇이 그리 슬펐을까. 생각건대, 여기서 말하는 ‘나비’는 바다 건너 낯선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벗 이상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의 못다 이룬 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삶을 슬퍼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얼마 후,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봄이 오니 형도 <제비>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그래서 나는 동경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


▲ 이상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김기림이 이상을 생각하며 쓴 것으로 추정하는 시 <바다와 나비>.




기림 형, 3월에는 부디 만납시다. 나는 지금 참 쩔쩔매는 중이오. 생활보다도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의논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만나서 결국 아무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만나기라도 합시다.  

서울을 떠날 때 생각한 것은 참 어림도 없는 도원몽(桃源夢,)이었소. 이러다가는 정말 자살할 것만 같소. 베개를 나란히 하여 타면(墮眠,잠만 잠)에 계속 빠져 있는 꼴이오. 

여기 와 보니 조선 청년들이란 참 한심합디다. 이거 참 썩은 새끼조차도 주위에는 없구려! 진보적인 청년이 몇 있기는 있소. 그러나 그들 역시 늘 그저 무엇인지 부절히(不絶-,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됨) 겁을 내고 지내는 모양이 불민하기 짝이 없습디다. 

3월쯤이면 동경도 따뜻해지리다. 동경에 들르오. 산책이라도 합시다. 

… (중략) …

망언, 망언. 엽서라도 주기 바라오. 

─  음력 제야에 이상 
─ 1937년 2월 10일(김기림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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