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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Sep 22. 2020

김유정이 죽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




▲ 휘문고보 시절의 김유정과 그가 남긴 작품들.



◆ 스물아홉이라는 짧은 생애에 비추어 김유정의 작품 수가 유난히 많은 이유


폐결핵으로 투병하던 김유정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필승(소설가 ‘안회남’의 아명)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해서 광명을 찾게 해다오”라는 마지막 편지를 안회남에게 보냈다. 안회남은 구한말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의 아들로 김유정과는 휘문고보 동창이자 절친한 벗이었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오. 요즘 나는 가끔 울면서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일뿐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큰형의 가산 탕진으로 인해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김유정은 병상에 누워 신음하면서도 쉬지 않고 글을 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도, 약을 사 먹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4백 자 한 장에 오십 전의 원고료를 받기 위해 피 섞인 침을 수시로  뱉어가며 소설과 수필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스물아홉이라는 짧은 생애에 비추어 김유정의 작품 수가 유난히 많은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 김유정이 짝사랑했던 여인들.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로 쫓아다닌 박녹주(사진 왼쪽)와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이유로 서른 여 통의 편지를 보냈던 시인 박용철의 동생 박봉자. 



◆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은 후 평생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려…

    짝사랑에 실패한 후에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폐결핵 앓아


김유정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윈 김유정은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러다 보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로 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 박녹주(훗날 판소리 명창이 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 당하자, 혈서를 쓰기도 했고, 심지어 죽이겠다며 살해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때 박녹주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그를 달랬다고 한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주시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이유로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에게 3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박봉자보다 먼저 편지를 발견한 박용철이 그의 편지를 모두 숨기고 말았고, 그녀는 김유정과도 잘 알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한다. 결국, 그 누구의 마음도 얻지 못한 김유정은 술에 의지하며 방황의 날을 보내야만 했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결국에 말없는 우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폐결핵입니다. 매일같이 피를 토합니다. 나와 똑같이 피를 토하는 여성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ㅡ 김유정이 잡지 《여성》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


그만큼 김유정은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항상 사무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그의 소설 <생의 반려>를 보면 주인공이 “난 어머니가 보고 싶다”라고 외치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는 실상 그의 내면에 숨죽이고 있던 그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 절친했던 시인 이상과 김유정. 두 사람은 1937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 벗들을 안타깝게 했다.



◆ 죽는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꺾지 않았던 김유정


1930년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한 김유정은 형의 사랑채를 이용해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불에 타 마을 청년들과 함께 ‘금병의숙(야학당)’을 짓는다. 금병산에서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직접 건물을 지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그는 당시 춘원 이광수가 벌이던 브나로드 운동의 영향을 받아 문맹 퇴치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현재 그곳에는 김유정 문학촌이 들어서 있어 많은 사람에게 그의 문학 정신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그의 손때 묻은 유품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죽자 그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소설가 안회남이 전집을 내준다는 이유를 대며 유품을 모아놓은 보따리를 가져간  후 월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안회남은 그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유정이 남기고 간 것, 많은 유고와 연애편지를 쓰다 둔 것과 일기, 좌우명, 사진, 책 이런 것들을 전부 내가 보관하여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 없어진 것이 있다. 그것은 다만 한 장 있던 그의 어머니 사진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김유정은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윈 김유정은 항상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진 역시 김유정이 가슴에 품고 간 것은 아닐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모두의 축복 속에서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쓸쓸하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김유정. 어느 날, 절친하던 시인 이상이 그를 찾아와 동반 자살을 제의한다. 하지만 그는 “내년 봄에도 소설을 쓰겠다”라며 일언지하에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때도 끝까지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약 한 번 쓰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고 만다. 불우하다고 말할 수밖에.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인해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며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猛熱, 몹시 뜨거운 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흥망)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보던 것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하여 네게 보내줄 테니, 극력(힘껏)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 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또 그렇게 되면 병이 더욱 깊어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해 무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와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만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쑥쑥)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오. 요즘 나는 가끔 울면서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일뿐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ㅡ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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