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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전쟁터를 누벼야 했던 어느 시인의 가족사랑

by 마테호른




11.JPG ▲ 시인 박인환과 종로에서 서점 <마리서사>를 운영할 때의 모습. 사진 오른쪽이 박인환 시인.



◆ ‘명동 백작’이라고 불렸던 멋쟁이 박인환…

시인 ‘이상’을 유난히 좋아해 이상의 기일이면 항상 폭음


시인 박인환은 ‘명동 백작’이라고 불릴 만큼 멋쟁이였다. 헌칠한 키, 수려한 외모, 뛰어난 시적 감수성 덕분에 그는 늘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1956년 3월 어느 날, 명동의 한 술집에서 문인들이 함께 술을 마시던 중 박인환은 즉석에서 한 편의 시를 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이 거기에 곡을 붙였고, 옆에 있던 가수 나애심과 테너 임만섭이 그 것을 불렀다.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무 잎은 떨어지고
나무 잎은 흙이 되고
나무 잎이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ㅡ 박인환, <세월이 가면> 중에서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후 즈음, 세상을 떠났다.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박인환은 시인 이상을 유난히 좋아했다. 이에 해마다 이상의 기일 즈음이 되면, “이상이 보고 싶다”라며 폭음을 하곤 했다. 1956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3월 17일을 이상의 기일로 착각했던 그는(실제로 이상이 죽은 날은 4월 17일이었음) 그날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사흘 간 만취한 끝에 20일 귀가 후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그러다 보니 끼니를 거르는 게 다반사였는데, 그런 상태에서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박인환6.JPG ▲ 노래 <세월이 가면>이의 탄생 주역들. 사진 왼쪽부터 즉석에서 가사를 썼던 시인 박인환, 작곡가 이진섭, 가수 나애심. ⓒ 사진 출처 ㅡ Jtbc 프로그램 캡처



박인환은 친구와 영화와 스카치 위스키인 조니 워커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죽자 친구들은 그의 관 속에 그가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넣어주기도 했다.


“장례식날,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에는 수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따랐고 그의 관 속에 생시에 박인환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 주고 흙을 덮었다.”

ㅡ 강계순, 《박인환 평전》 중에서



▲ 1948년 봄, 덕수궁에서 있었던 박인환의 결혼식 사진. 그의 신식 결혼식은 문인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 의대 중퇴 후 종로에서 서점 <마리서사> 운영…

종군기자로서 수많은 전장 누비벼 ‘편지’ 통해 가족에게 애뜻함 전해


강원도 인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인환은 한때 의사를 꿈꾸며 평양의전에 진학했을 만큼 전도유망했다. 하지만 문학의 꿈을 저버리지 못해 결국 의대를 중퇴하고 만다. 그리고 1945년 말, 박인환은 아버지에게 3만 원, 이모에게 2만 원을 빌려 서울 종로 낙원동에 서점 <마리서사>를 열었다. 그가 좋아하는 프랑스 출신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과 책방을 뜻하는 ‘서사(書舍)’를 합친 말이었다. 하지만 <마리서사>는 책을 팔기보다는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평생의 단짝인 부인 이정숙을 만난 곳도 <마리서사>였다. 당시 이정숙은 진명여고 졸업 후 여성잡지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마리서사>를 자주 드나들며 시집을 사곤 했다. 이를 본 박인환이 그녀에게 시집을 권하거나 자기 시가 실린 신문을 보여주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다. 그리고 1948년 봄,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식 결혼식을 덕수궁에서 올렸다. 당연히 이날의 결혼식은 문인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얼마가지 못했다.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두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대구로 피난을 간 박인환은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일하다가 육군 종국 작가단에 들어가 수많은 전선을 누비며 목숨을 건 기사를 쓴다.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지만, 부부는 서로 사랑했고, 두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그 즈음, 박인환은 가족과 떨어져 있는 동안 수많은 편지로 서로의 마음과 안부를 전했다. 하지만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반드시 존칭을 사용했고,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아버지로서 따뜻한 사랑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만큼 박인환의 편지에는 애뜻한 마음이 가득 묻어나 있다.




세화가 아프다니 걱정입니다. 우선, 음식 조심시켜야 합니다. 당신의 책임은 어린애들을 잘 기르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세화가 불쌍합니다. 그 귀여운 얼굴로 몸이 아파서 찡얼거리며 ‘아빠, 아빠’하고 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니 더욱 귀엽고, 애절합니다.

세화가 빨리 건강해지도록 오늘 저녁 자기 전에 하나님에게 기도 올리겠습니다. 세화에게 전해주십시오.

ㅡ 세화야, 아빠는 네가 보고 싶다. 참으로 귀여운 세화야, 아빠는 네 곁에 있어야 할 것인데, 가족이 무엇인지 나보다도 우리 가족을 위해 지금 너와 떨어져 있단다.

세화야, 세형이 오빠하고 즐겁게 놀도록 빨리 회복해라. 할머니가 너무 먹을 것을 많이 주더라도 먹지 말고, 몸조심해라.

아빠는 네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손에 아무 맥이 없다. 그리고 눈물이 난단다.

너, 내 사랑하는 딸 세화야, 빨리 나아라. 그리고 어머니 걱정시키지 마라. 세형이 오빠하고 잘 놀아라. 아빠가 빨리 집에 갈 것이니, 우리 다 함께 즐겁게 만나자. ㅡ

세화 생각을 하니 또한 세형이 모습이 오고 갑니다. 그놈은 요즘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길가에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직접 전해주시오.

ㅡ 세형, 길가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엄마하고 있어라, 응. ㅡ

… (하략) …

ㅡ 박인환




사랑을 쓰다 그리다 그리워하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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