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한의사, 아버지는 양의사였던 나도향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경성의전에 진학했지만, 소설을 쓰고 싶다며 일 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집안 어른들의 강력한 바람도 가슴 속 열망을 지우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나도향은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에 대한 저항으로 이름과 의학 공부를 포기했다. 사실 그의 본명 ‘경손’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직접 짓은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가 지어준 ‘경손’이라는 이름 대신 직접 지은 ‘도향(‘벼꽃 향기’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그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 잠시 떠돌다가 사라지는 향기 ‘향(香)’자를 써서 그가 일찍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대 중퇴 후 이상화,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으로 참여하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나도향은 천재 작가로 불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작가로서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려는 때 급성 폐렴으로 인해 요절하고 말았다.
작가로서 나도향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5년에 불과했다. 그 동안 그는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뽕> 등 2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피 묻은 몇 장의 편지>와 <화염에 쌓인 원한> 등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집에서 거리에서 그대 얼굴 볼 수 없네
간 지 벌써 한 해로되 어제인 듯 애닮아라
벗끼리 모여 앉으나 그대 자리 비었네.
그대 무덤가는 길이 풀 밑에 묻혔구나
해와 달은 기억조차 쓸어가려 하네만은
한 조각 설은 그림자 그려마지 못하네.
거울처럼 마주앉아 웃고 울기 같이할 때
뉘 하나 앞서갈 줄 뜻이나마 하였던가
애닮다, 남겨둔 글만 그대같이 대하네.
ㅡ 이은상, <추억의 도향>
1927년 <현대평론> 8월호에는 나도향의 1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글이 특집으로 실렸다. 이에 한때 그와 일본에서 하숙을 같이 했던 염상섭을 비롯해 이태준, 김동환, 정인보, 이은상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살아생전 그와 있었던 추억 및 그의 작품, 삶에 관한 다양한 글을 실었다. 이렇듯 수많은 작가가 앞다퉈 나도향을 추모한 이유는 그의 죽음을 문단 전체의 죽음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 작가들은 먹고살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위 글은 벗 이은상이 쓴 <추억의 도향>으로, 사랑하는 벗의 부재가 주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나도향과 이은상은 인연은 이은상이 와세다대학 사학부 수강생 시절, 잠시 일본에 머물던 나도향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는 데, 이후 나도향이 요절할 때까지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벗으로 지냈다.
1923년 무렵부터 결핵을 앓았던 나도향은 1925년 여름, 요양을 할 목적으로 마산에서 3개월 동안 머문 적이 있다. 이때도 그는 이은상의 고향집에 머물렀는데, 이때의 체험을 <피 묻은 편지 몇 쪽>이라는 단편에 담기도 했다.
마산에 온 지 벌써 두 주일이 넘었습니다. 서울서 마산을 동경할 때는 얼마나 아름다운 마산이었지요. 그러나 마산에딱 와서 보니 동경할 때 그 아름다운 마산은 아니요, 환멸과 섭섭함을 주는 쓸쓸한 마산이었나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두고두고 몇 번씩 되짚어 말해온 조선 사람의 쇠퇴라든지, 우리의 몰락을 일일이 들어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중략) …
바람도 없고, 물결도 없습니다. 바다가 아니요, 호수같이 마산만의 푸른 물은 마치 어떠한 그릇에 왜청(倭靑, 검은빛을 띤 푸른 물감)을 풀어서 하나 가득 담을 듯이 묵직하고 진합니다. 그 위로 사람이 굴러도 빠지지도 않고 거칠 것도 없을 듯이 잔잔하고 평탄합니다.
ㅡ 나도향, <피 묻은 편지 몇 쪽> 중에서
몸이 불편한 나도향에게 있어 남쪽 바다는 더는 낭만과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고 동경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보였었을 수밖에.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남쪽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그의 헛헛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글이다.
어느 해 겨울, 도향이 무전여행을 하고 왔다며, 낙원동에 있는 여관에 다른 친구와 함께 찾아와서 놀다가 잘 곳이 없다며 같이 자자고 해서 그 밤을 함께 밝힌 일이 있다. 아침에 피곤한 눈을 비비고 일어났을 때 나는 그의 축 처진 눈, 좋지 못한 혈색을 보고 그의 쇠약함을 추리할 수 있었다.
… (중략) …
생각건대, 그는 어지간히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의 놀라울 만한 조성(早成, 일찍 이룸)은 그의 높은 재질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 내가 본 것이 틀림없다면 ─ 자기가 믿는 완전한 길을 찾고자 헤매었다. 그의 작가적 본질은 낭만주의를 다분히 띠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낭만주의를 버리고 사실주의로 들어가려고 한 흔적이 보였다. 그가 사회 문예로 눈을 옮길 때가 그때였다. 그리하여 그는 변화해 가는 시대에 될 수 있는 한 민감해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피 묻은 편지 몇 쪽>이 그의 최후 작품이 되었다) 낭만주의를 버리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동경에서 돌아와서 그는 어떻게 하고 있었으며,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죽은 그에 대해 결론하여 말하자면, 그는 자기의 일생을 통해 보건대, 참말로 시대에 눈뜨고, 자기에 눈뜨려 할 때 요절하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완성인 채로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ㅡ 김기진, <도향을 생각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