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첫사랑이 그리울 때

―《나이 들수록 나는 젊은 네가 그립다》

by 마테호른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해주는 삶의 생채기 같은 흔적 말이다. 때때로 그런 이야기는 작위적이다. 자기 미화(美化)와 합리화를 통해 실제 이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적극적으로 변호하기 때문이다. 슬픔은 그런 이야기를 바꾼다.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슬픔은 무겁고, 아프다. 그리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슬픔은 참을 수가 없다. 마주하기 싫지만, 결국은 마주해야 한다. 그러니 슬픔은 살면서 누구나 짊어져야 할 무거움이자, 참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슬픔과 그리움은 점묘법처럼 다가온다. 조금씩, 천천히, 점점 크게…


슬픔과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특히 젊을 때보다는 나이 들어갈 때 불쑥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한 것보다는 하지 못한 것, 이룬 것보다는 이루지 못한 것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미련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감추기에만 급급할 뿐, 꺼내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아픔의 강도는 줄어들 수 있지만, 그 응어리는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응어리를 풀려면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슬퍼하고, 그리워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위안 받을 수 있다.


여기, 슬픔과 그리움에 관한 한 권의 시집이 있다. 시인은 나이 들수록 조금씩, 천천히, 점점 크게 다가오는 슬픔과 그리움을 거부하고 억지로 맞서기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쪽을 택했다. 그 때문에 슬픔은 더 슬프고, 그리움은 더 그리워 보인다.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겨우 여기까지 왔건만
결국은 제자리
발버둥치고 발버둥치고 발버둥쳐서
겨우 벗어났다 생각했건만
언제나 제자리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꼬인
무엇 하나 가늠할 수 없는
악몽 같은
인생의


― 〈뫼비우스의 띠〉


만일 네가 지옥의 문 앞에 서 있고
내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다면
나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너를 쫓아갈 테야
하지만,
만일 네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고
내가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다면
나는 고개를 돌리고
너를 못 본 척할 테야
너의 행복을 빌어줄 테야

너를 볼 수 없는 지금, 나는
지옥의 문 앞에 와 있는 것만 같다
부디, 너만은 행복하기를

― 〈선이 3〉


누구나 젊고 잘 나갈 때는 앞만 보면서 달린다.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고 “이건 아니다”라고 해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과 지나친 소유욕이 낳은 욕심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고, 웬만해서는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비로소 깨닫는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쉰 즈음, 인생의 가을을 맞아 올라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속내와 바깥 풍경에 관한 솔직하고,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는 《나이 들수록 나는 젊은 네가 그립다》는 자기성찰의 시집이다.


첫사랑의 애틋함과 그리움서부터 더는 볼 수 없는 사람들과 사물에 관한 아름다운 기억, 삶에 관한 뒤늦은 깨달음 등에서 비롯된 깊은 사유(思惟)가 친숙하고 감성 깊은 시어로 무장해 굳게 걸어 닫은 우리 마음을 무시로 공략한다.


가을을 맞아 첫사랑이 문득 그립거나,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자꾸 떠오를 때, 나를 아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갈 때 한 번쯤 읽으면 적잖이 위안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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