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맞이한 대학 여름방학.
자유를 만끽하는 대학생에게는 매일 방학과도 같은 날이었지만,
여름방학만의 여유와 느긋함은 또 달랐다.
아침 일찍 수업에 맞춰 잠에서 깨야 할 부담도 없고,
길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숨 가쁘게 오르내릴 걱정도 없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하루의 시작과 끝은 오롯이 내 마음에 맡겨져 있었다.
그해 여름, 태양은 마치 세상을 녹일 듯 이글거리며 내려앉았다.
매미는 쉬지 않고 울어대고,
아지랑이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 허공에서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느즈막이 자고, 느즈막이 일어나던 나날들.
생각이 멈춘 머리로 나는
가끔 스스로를 자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도 반성하는 인간’임을 주장하며 위안을 찾은 것이다.
누군가는 여름이면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놓고
세상의 흐름을 한눈에 지켜본다지만,
우리 집 앞에는 나무가 없었다.
대신, 옆집 지붕이 햇볕을 부드럽게 가려주었다.
그 아래, 그늘진 작은 공간에서 나는
평상에 누워 책을 읽곤 했다.
그 순간, 세상은 잠시 숨을 멈췄다.
엷은 바람에 흔들리는 공기는 시계 초침처럼 여름을 천천히 쪼개고 있었고,
나는 활자 세계로 스며들었다.
책은 추리소설이었다.
페이지마다 예상치 못한 단서가 흘러나왔고,
날카로운 긴장감은 한낮의 더위를 한순간에 잊게 했다.
뜨거운 햇살이 여전히 내 등을 내리쬐었지만,
이야기 속 음모와 비밀은 차가운 바람처럼 나를 감싸안았다.
여름 오후는 길고 느리게 흘러갔지만,
소설 속 시간은 숨 가쁘게 달렸다.
등 뒤로 스며드는 열기, 이마에 맺힌 땀, 그 모든 감각이 이야기에 녹아들었다.
그날의 여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의 장르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름이 오면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바람과 햇살, 활자와 청춘이 뒤섞인 시간.
나에게 여름은, 그 자체로 추리소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름이면
추리소설을 읽는다.
내게 여름은,
추리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