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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때문에 절필까지 했던 정지용

1942년 6월 3일 作, <쉽게 쓰여진 시>

by 마테호른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정지용,《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 중에서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1942년 6월 3일 作, <쉽게 쓰여진 시>


★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이바지를 한 사람이 벗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라면,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1947년 초,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던 정지용을 같은 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시인의 벗, 강처중이었다. 그는 죽은 벗의 육필 원고를 건네며,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이에 정지용은 꼼꼼한 검토 후에 그중 하나를 1947년 2월 13일 자 신문에 싣는다. 유작 <쉽게 씌여진 시>였다. 하지만 정지용은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직접 소개 글까지 덧붙인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그는 왜 무명 시인의 시를 자랑스럽다고 했을까. 그가 쓴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그 영향이었을까. 그 후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이라는 글에서 정지용은 무력했던 자신의 행적을 고백한 후 절필 선언까지 한다.


“친일도 배일도 못 한 나는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과연, 시인의 무엇이 그에게 절필까지 하게 한 것일까. 암울하고 혹독한 상황에서도 우리말로 시를 쓰고, 일본에 저항했던 시인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그것이 못내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시인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쉽게 쓰여진 시>는 어둡고 암울한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작품으로, 시인이 스물여섯이던 1942년 일본에서 쓴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는 고국을 떠나 홀로 육첩방에서 어버이의 땀내와 눈물이 담긴 학비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시인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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