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초 추정 作, <봄>
1943년 7월 14일, 귀향하려던 시인은 일본 경찰에 갑자기 체포된다. 체포 이유는 ‘치안유지법 위반’이었지만, 실상은 우리말로 시를 써서 조선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하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렇게 해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시인은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 아른, 높기도 한데…
─ 1942년 초 추정 作, <봄>
★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시로 시인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된다. 6년 전인 1936년 10월에 쓴 같은 제목의 <봄>이라는 동시가 있는데, 이는 따뜻한 봄의 기운을 밝은 동심으로 노래한 것으로 이 작품과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여타 작품에서 봄은 ‘따뜻함’, ‘평화로움’, ‘희망’ 등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봄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시인에게 있어서 봄은 ‘새로운 세상’, 즉 ‘조국의 광복’을 의미했다. 하지만 끝내 조국의 새로운 봄을 보지 못한 채 압제자의 땅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43년 7월 14일, 귀향하려던 시인은 일본 경찰에 갑자기 체포된다. 체포 이유는 ‘치안유지법 위반’이었지만, 실상은 우리말로 시를 써서 조선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하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렇게 해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시인은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26분, 돌연 별세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본인 간수는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큰소리를 외치고 나서 운명했다”라고 전한 바 있다.
그로부터 열흘 후, 그의 고향 집에 한 통의 전보가 전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에 가족은 경악했다.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의 집도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날 시인의 가족과 벗들은 《문우》에 발표했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을 낭송하며 시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하루 뒤인 3월 7일, 송몽규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동반자가 되었다.
묘비석은 6월 14일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명동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김석관이 썼다. 김석관은 비문에 다음과 같이 쓰며,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제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은 변하고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됐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능이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 퍼질 만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현 장로의 손자이며, 영석 선생의 아들로서 명민하여 배우길 즐긴 데다 새로운 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