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용정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 교내 잡지를 발간하는 일 외에도 농구와 축구를 즐겼으며, 웅변도 곧잘 했다고 한다. 이에 학교 농구선수로도 활약했다. 우리가 아는 한없이 여리고 부드러울 것만 같은 그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다. 그만큼 시인은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평양 숭실중학교 자퇴 후 용정으로 돌아와서 쓴 <오후의 구장> 은 축구 경기 후 돌아본 주변 풍경을 매우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 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연기를 자욱이 품기고
소리치고 지나가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뽈)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순환이 잦고
두 철각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랑 저 쪽으로
까라앉는다.
─ 1936년 5월 作, <오후의 구장>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는 산책과 독서를 즐겼다. 특히 산책을 좋아해서 웬만한 거리는 전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고 한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4학년 때 쓴 산문 <종시>를 보면, 학교에서 집으로, 다시 집에서 학교를 오가며 봤던 당시 서울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남대문 근처에서 봤던 서민과 밤늦게까지 철길에서 공사하던 노동자를 바라보던 대목에서는 시인 특유의 따뜻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다.
턴넬을 벗어났을 때 요지음 복선 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아침 첫차에 나갔을 때에도 일을 하고 저녁 늦차에 들어 올 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시작하야 언제 그치는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그 육중한 도락구를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遙遠)하데 있어 도락구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新京行)이니 북경행(北京行)이니 라고 써서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다닌다.
─ 1941년 作, 산문<종시>중에서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립고 설레는 곳이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와 동무들이 있는 고향이 그리워 매일 학교 가는 길에 보게 되는 기차를 보며 고향 생각에 설레곤 했다.
“시그널(Signal)을 밟고 기차는 왱─ 떠난다. 고향으로 향한 차도 아니건만 공연히 가슴은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