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후회하게 된다’라는 말로, 존귀한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교만함을 경계하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된다는 뜻이다. 공자는 이 항용의 단계를 매우 경계했다. 더는 오를 곳이 없기에 교만해져서 결국 민심을 잃고, 남을 무시하기에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져 후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亢龍有悔). 이는 무조건 정상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다.
젊은 시절 한신은 걸식표모(乞食漂母,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라는 것에서 유래한 말)의 삶을 살았다. 밥을 얻어먹고 다녀야 했을 만큼 가난했고, 동네 불량배들의 가랑이 밑을 기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포부만큼은 누구보다 원대했다. 그런 그를 알아준 사람이 바로 한 고조 유방의 참모 소하였다. 그는 한신을 고조에게 데려가 대장군 중책을 줘야 한다며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의 실력과 가치를 꿰뚫어 본 것이다. 결국, 고조는 소하의 말을 믿고 한신을 대장으로 임명했고, 한신은 승승장구했다.
사실 고조 유방의 부하가 되기 전, 그는 항우 밑에 있었다. 하지만 항우는 그가 제안을 올릴 때마다 철저하게 무시했고, 어떤 계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그는 항우에게서 도망치고 말았다. 만일 항우가 그를 믿었다면 천하는 그의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한신은 뛰어난 지략을 선보이며 고조가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일 한신이 거기서 끝냈다면 ‘초한삼걸(初漢三傑, 한 고조가 꼽은 창업 공신 세 사람)’로서 존경받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고조보다 더 뛰어나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 고조의 의심을 샀을 뿐만 아니라 뒤늦게 반란을 꾀하다가 자신은 물론 일족이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천하 통일 후, 고조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개국 공신들을 차례대로 숙청했다. 한신(韓信) 역시 그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한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고조나 한 왕실 처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세력을 지닌 그가 미덥지 못했을뿐더러 그가 숨겨둔 야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조에게 있어 한신은 ‘사냥을 마친 개’였다. 어떻게든 처리해서 힘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이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조금이라도 모반의 기미가 엿보이면 제거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한신이 항우의 장수였던 종리매(鐘離昧)를 숨겨준 것이다. 고조는 이를 기회 삼아 한신을 장안으로 압송한 후 회음후(淮陰侯)로 좌천해 도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즈음 있었던 일이다.
고조가 한신과 장수의 그릇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소?”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10만 명쯤 거느릴 수 있는 장수에 불과합니다.”
“그대는 어떻소?”
“신은 신축자재(伸縮自在, ‘늘었다 줄었다 하는 데 구애받지 아니한다’라는 뜻으로 조건과 환경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 여유 있고 구속이 없음을 이르는 말)해서,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10만 명의 장수를 거느릴 수밖에 없는 과인의 포로가 되었소?”
그러자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건 폐하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라 장수의 장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입니다.”
결국, 고조의 의심을 산 한신은 자신은 물론 삼족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 《정관정요(貞觀政要)》 중에서
한신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회음후로 강등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은연중에 드러낸 셈이다. 고조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에 그를 더욱 꺼리고 의심하게 되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리더로 적합한지를 말하고 있다. 병사를 다스리는 능력과 장군을 다스리는 능력은 엄연히 다르다. 이것이 바로 ‘그릇의 차이’이다.
수나라의 유학자 왕통(王通)은 멈춤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삶은 나아가는 것 못지않게 멈추는 것 역시 중요하다”라며, 멈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멈춤은 패배나 퇴보가 아닌 용기 있는 사람만이 실현할 수 있는 철학이자 성공하는 삶의 필수 덕목이다.
왕통은 20세 때 수 문제(文帝)에게 ‘태평 10책’이라는 개혁안을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분(河汾)에 은둔하며 ‘멈춤’의 철학을 집대성했는데, 이때 제자 중에는 당 태종 치세에 개혁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멈춤의 지혜는 달리 말하면 기다림이다. 신하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군주를 원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 마침내 제(齊)나라를 세운 소도성(蕭道成), 19년간의 망명 생활에도 방종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여 진(晉)나라의 군주가 된 중이(重耳), 자신의 영광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살펴 성급한 개혁조차 멈췄던 당 태종은 그런 점에서 멈춤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오만하고 멈출 줄 모른다. 오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삶은 상황을 오판하게 해 끊임없이 질주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멈출 수 있다. 멈춤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로잡고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신의 실패 뒤에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멈출 줄 몰랐던 그의 자만과 만용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