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부모는 ‘헬리콥더’ 아닌 ‘교통경찰’ 이 되야…

by 마테호른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없다.

하지만 어른이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는 아이도 없다.

__ 제임스 볼드윈




◆ 야생화가 주는 교훈


지난 봄, 시골로 이사한 친구 집을 방문한 적 있다. 못 본 지도 오래되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시골살이가 무척 궁금했다.


일여 년 만에 본 친구는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오랜만의 만남을 내색할 줄도 몰랐고, 예전 모습 그대로 무덤덤했다. 어제 퇴근 후 오늘 다시 만난 사람처럼 “왔냐?”라고 한마디 할 뿐이었다.


서울에서와는 달리 그의 몸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미소 역시 시골살이에 만족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하기야 시골살이는 도시 출신인 그의 로망이기도 했으니, 그 바람을 이룬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친구 집에 들어서자 열 평 남짓한 화단이 보였다. 때마침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기에 “꽃 키우는 취미도 있었냐?”라고 했더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꽃 키우는 게 만만치가 않아. 어떤 꽃은 심기가 무섭게 금방 시들해져서 죽어버리더라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꽃은 그러다가도 곧 살아나서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워. 비닐하우스에서 사 온 꽃일수록 특히 신경 써야 해.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곧 시들어버리거든. 하지만 저기 철쭉처럼 야생에서 자란 꽃은 자생력이 있어. 시들시들하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저렇게 예쁜 꽃을 피우거든.”


그러고 보니 예쁘게 꽃이 핀 것들은 대부분 야생화였다. 온실에서 자란 것들은 아직 날씨가 덜 풀려서 집 안에 두었다고 했다.


꽃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그 말에 공감할 것이다. 화분을 사서 키우다 보면 온실에서 자란 것일수록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시들해진다. 그러나 야생에서 자란 화초는 대충 내버려 둬도 때가 되면 스스로 꽃을 피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보다는 적당한 관심을 받고 자란 아이가 더 승리욕 있고 어려움 역시 잘 이겨낸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충분히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그만 걸림돌에도 넘어지기 쉽다.



blur-3162529_1280.jpg ▲ 따뜻한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꽃보다는 혹독한 추위를 이긴 야생화가 더 생명력이 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 아이의 인생을 자기 인생처럼 착각하는 ‘헬리콥터 부모’


아이의 모든 생활을 위에서 내려다보듯 통제하고 간섭하는 부모를 일명 ‘헬리콥터 부모’라고 한다. 그런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자립심이 없다. 모든 것을 부모가 알아서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마다 “어떻게 하지?”라며 부모의 생각을 묻는다. 또한, 그런 부모일수록 아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잘 모른다. 오죽하면 “부모야말로 자기 아이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혹시 알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애써 무시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일을 강요한다. 아이의 인생을 마치 자기 인생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언젠가는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를 위한 제대로 된 교육일까.


요즘 뉴스를 보면 아이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가 장난이 아니다. 아이들이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혀를 내두르게 하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아이라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 부모의 태도다. 피해자에게 미안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때로는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 부모도 간혹 있다.


그들은 “우리 아이도 피해자”라며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문제를 오히려 더 키운다. 그런 기사에는 어김없이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부모가 저러니 아이가 뭘 보고 배웠겠냐”라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물론 그중에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도 있지만, 멀쩡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훨씬 많다. 그런 걸 보면 부모의 아이 양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삐뚤어진 행동을 곧잘 하거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성인도 적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내가 최고’라는 선민의식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과잉보호 받고 자란 아이들에게서 그런 태도를 자주 볼 수 있다. 역시나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얼마 전 여덟 살짜리 초등학생을 뺑소니치고 달아났던 카자흐스탄인이 자진 입국해서 첫 재판을 받았다. 그 재판에는 그의 어머니도 모습을 보였는데, 그 말과 태도가 자못 인상적이었다.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를 통감한다면서, 피해 어린이가 필요로 한다면 자신의 장기라도 이식하겠다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사실 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것만큼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없다. 그런데 그런 순간 어떤 부모는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치지만, 어떤 부모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고개를 뻣뻣이 들곤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부모의 품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부모만큼 아이에게 좋은 본보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가 올바른 가치관을 보이면 아이 역시 그걸 배우면서 바른 품성을 지닌 아이로 자란다.



girl-1641215_1280.jpg ▲ 부모는 아이의 꿈을 키워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조력자로만 남아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진정한 역할이다.



◆ “부모들의 역할은 교통경찰과도 같아야”… 제 방향으로 가도록 안내만 해야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 그 때문에 많은 부모가 아이 공부에 크게 신경 쓴다. 사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만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우리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예전에는 공부만이 출세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변했다. 공부 말고도 성공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경험도 충분히 쌓게 하고,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게 하면서 돈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게 해야 한다.


아동 심리학자들은 “부모들의 역할은 교통경찰과도 같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아이에게 운전기술을 가르친 후 그냥 제 방향으로 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넘어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하고 심지어 핸들을 빼앗아서 부모 마음대로 운전하면 언젠가는 행로를 이탈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아이의 삶은 온전히 아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부모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과잉보호할수록 아이는 지치고 힘들어질 뿐이다. 또한, 그렇게 하면 아이 스스로 자기 삶을 만들어갈 수 없다. 부모는 아이의 꿈을 키워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조력자로만 남아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진정한 역할이다.




포스트 배너.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열심히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