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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Jan 04. 2022

그 과장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굳게 믿었었다. 2016년,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모두가 취업을 위해 고공분투 중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나의 전공을 살려 취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청년 실업률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세상에서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협회, 공공기관까지 가리지 않고 어디든 ‘취업’만 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밤을 새워가며 대중 소설 같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어떻게 사람을 가려내는지 과정과 결과의 연관성도 알 수 없는 인적성 시험을 보았다. 겨우 1차 합격한 회사로 검은 정장을 입고 장례식장에 가듯 면접을 다녔다. 안타깝게도 줄줄이 낙방이었다. 취업만이 목적인 나와 그 회사를 위해 몇 년씩 준비한 다른 학생들을 비교하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1년 뒤, 전공 관련 시험으로 입사할 수 있는 회사에 합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턱걸이 합격이었는지 나는 연고지인 대전에 배치받지 못하고 편도, 운전으로 3시간, 교통수단으로 5시간이 걸리는 경남 김해에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합격발표가 나고 출근까지 남은 기간은 일주일뿐이었다. 부모님과 급하게 김해로 내려가서 바로 입주가 가능한 집을 찾아다녔고, 3개월 수습 기간 뒤에 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 수 있다는 말에 단기계약으로 비싼 돈을 주고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적금통장을 깨서 딸이 살 집의 보증금을 마련해 주었다.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그토록 어려운 취업을 했으니 앞으로 펼쳐질 꽃길만 생각했다. 당연히 꽃길만 있을 줄 알았다. 


 출근은 새벽 6시까지였다. 전날 생산된 제품을 다음 날 아침 일찍 납품해야 했기 때문에 새벽 6시부터 빠르게 일 처리를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수습 기간이라 초과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저녁 6시까지 12시간을 근무했다. 가끔은 회사 내 기계 고장으로 10시까지도 야근을 했다. 그래도 취업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집에 혼자 있다 보면 외로움이 사무쳐 차라리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동안 0℃ 이하 냉동실에서 일했는데 패딩을 두 개씩 입고도 손발이 꽁꽁 얼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업무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표준어를 쓰는 내가 경상도 사투리를 못 알아들으니 전화 너머 고객님이나 상사가 답답하다며 화를 내기도 했는데 화를 내는 상황조차도 외계어로 들려 알아들을 수 없으니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수습 기간이라서 통장에 찍히는 돈은 세후 130만 원 남짓,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대전과 김해를 오가는 기차를 탔을 뿐인데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래도 앞으로 오를 급여만 생각하며 참았다. 하지만 첫 직장임에 동시에 첫 자취생활이었기에 피곤함을 못 이겨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고된 노동으로 체중이 점차 줄었고 건강은 알게 모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외로움으로 텅 빈 마음은 병들어갔다.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고생 끝에 고생만 있었다.     


 그렇게 4개월쯤 지났을까, 사수가 바뀌었다. 전국으로 발령이 잦은 회사인지라 같이 일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다반사였다. 새로 온 사수는 나보다 11살이 많은 박 과장님이었다. 안경을 쓰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동네 아저씨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네 오빠라고 생각해. 힘든 거 있으면 다 말하고.”라고 했다. 오빠와 아저씨 사이는 조금 거리감이 있었지만 보통 회사 사람과는 다르게 친근하게 다가와 주니 오빠정도는 해주기로 했다. 그날부터 박 과장님은 냉동실에서 근무가 끝나면 사무실 식구들이 먹을 수 있게 라면을 냄비가 넘치도록 끓여주었다. 새벽 출근에 대부분 아침 식사는 거르고 출근했는데, 같이 근무하는 6명이 조촐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고 얼었던 몸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피곤한 모습의 직원들은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하하 호호 웃으며 마음까지 따뜻한 온기를 찾아갔다. 김치도 집에서 직접 가져와 넉살 좋게 아내가 담근 거라 엄청 맛있다며 김치통 바닥이 보이지 않게 매번 가득 채워두었다. 매일 먹는 라면이 물리지 않게 배추김치 라면, 무김치라면, 밥 라면 여러 가지 라면을 끓여주었다.   

 

 어느 날은 비가 억세게 내리는 새벽이었다. 빗소리가 얼마나 큰지 알람 소리가 아닌 빗소리로 잠을 깼다. 집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십 분 거리지만 비가 많이 와서 갈아입을 옷을 챙길지 그냥 슬리퍼를 신고 갈지 고민하던 중에 박 과장님께 전화가 왔다. 비가 많이 오니 출근길에 나를 태우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타지에서 지쳐가는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전화였다. 그 뒤로도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에게 출근하는 길이라며 집 앞에서 태우고 가주었다.     


 여자는 몸이 차가우면 안 된다는 옛말이 있는데도 나는 매일 아침 냉동실에서 3시간을 보내다 보니 몸에서는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냉동실 밖에서도 내 몸은 온종일 한기가 돌았고 여름에도 패딩을 입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생리통도 참을 수없이 심해져 네발로 기어서 출근하는 일도 잦아졌다. 박 과장님은 안쓰러우셨는지 냉동실에서 쓸 목도리를 “지인이 떠줬는데 안 쓰니 너 써라.”라며 던져주었고, 아픈 날에는 “오늘은 쉬어라, 할 일 있으면 내가 대신 일 하겠다.”라며 배려해주었다. 자취하면 잘 먹어야 한다며 가끔 달걀 한 판도 사서 내 손에 들려주었고 공돈이 생기면 치킨이라도 시켜 먹으라며 용돈을 챙겨주기도 했다. 등산을 좋아하는 과장님이 대전 근처 산을 갈 때면 기찻값 아끼라며 과장님 친구들과 같이 타고 가는 차 안에 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밖에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나에게 일을 툭 던져주는 것이 아닌 앞에서 하나하나 업무처리 방법을 세세하게 일러 주었고 고객과 통화하는 방법 등 간단한 업무도 직접 처리하는 모습 보여주며 친절한 사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사수는 박 과장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박 과장님 덕분이었다. 나의 고생길 끝에 박 과장님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나는 자외선 가득한 햇볕 아래 뜨거워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세상에서 그의 그늘 속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박 과장님이 만들어 준 안식처에서 나는 아무것도 괜찮지 않던 나를 뒤돌아보며 외로움, 고단함으로 똘똘 뭉쳐 병든 마음과 몸을 차차 회복해갔다. 운동을 좋아하는 박 과장님은 ‘운동이 보약’이라며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지는 나에게 운동을 추천하여 반강제로 난생처음 요가를 시작했다. 생각 외로 요가는 지쳐가는 심신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지금까지도 내가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고마운 점을 나열하다 보니 박 과장님은 거의 나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은 각자 맡은 일만 딱 처리하고 칼퇴근을 일삼는 직원들도 많다. 남 일은 남 일일 뿐이다. 각자 각박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도 급박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회사의 배려로 연고지인 대전에서 일하고 있다. 박 과장님과 떨어져 일한 지 꽤 지났지만, 여전히 박 과장님께 가끔 전화가 온다. 어떻게 집에 가더니 연락 한 통 없느냐, 서운하다는 농담과 섞어 안부를 묻는다. 나 역시도 내 살길이 급급해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정신없이 사는데 지금까지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는 박 과장님 덕에 세상의 따스함을 다시금 떠올린다. 잊혀질 즈음에 연락 오는 박 과장님을 보면서 그때만큼은 마음을 다시 먹는다. 박 과장님의 선한 영향력을 나도 후배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해드린 것도 없는데 조건 없이 퍼주기만 한 박 과장님의 따뜻한 마음으로 온 세상을 밝혔기에 나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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