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시스터즈_ 영국여행기
그날도 역시나 나는 늦었다. 전날 밤늦게 잠든 것도 아침에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샤워를 오래 한 것도, 나갈 준비를 뭉그적거린 것도 아니었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귀찮아서 화장조차 잘 안 하는 편이며 옷도 널브러진 것 중에 아무거나 주워 입는 편이었다. 그날은 영국의 관광명소인 하얀 절벽 세븐 시스터즈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런던에서 세븐 시스터즈로 가는 기차 출발시간을 염두에 두고 나갈 채비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출발시간이 임박해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죽어라 뛰었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그때서야 동생은 4명 이상의 기차표를 한 번에 발권해야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알 게 뭐냐. 우리는 늦었고 주변에 사람들을 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냥 냅다 티켓 발권 줄에 서서 배고픔을 달래며 제발 남은 자리가 있기를 기도하는데 어디선가 한국어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한국인 모녀가 우리에게 한국인이 맞지 않느냐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인이세요?”
한국인이었던 모녀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4명 티켓을 같이 발권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운 좋게 티켓을 할인받아 살 수 있었다. 빨리 왔더라면 이렇게 쉽게 할인 티켓을 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참 반갑고 즐겁다.
사실 나는 계획적이지 않다. 여행을 가도 한국인들은 꼭 들린다는 관광명소, 유명한 식당을 인터넷으로 찾아 계획적으로 줄 세우는 일은 나와 거리가 멀다. 나는 그저 낯선 곳에 내가 놓일 때 그곳을 그대로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현지인들과 같이 평소에 그들이 다니는 길을 걷고, 현지 음식을 먹고, 낯선 곳에 오래오래 머물며 현지인인 척 그곳을 누리는 것이 좋다. 그런데 동생은 나와 정반대다. 온갖 정보를 미리 찾아보고 먼 길을 떠난다면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보고 먹고 와야 한단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여행 계획은 몽땅 맡겨버렸다. 덕분에 잘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동생은 화가 난다더라. 그래도 내가 언니니까 네가 해! :)
세븐 시스터즈는 하얀 절벽인데 그 풍경이 아주 장관이라고들 했었다. 나는 유럽 여행 중임에도 전날까지 그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 동생이 가고 싶단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동생 정보에 의하면 기차로 1시간 반, 도착한 기차역에서 버스로 한 시간 그리고 걸어서 한 시간을 가야 그 절벽을 볼 수 있단다. 아침부터 굶주려있었기에 긴 여행을 위해 당장 먹을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노상에서 빵을 파는 아저씨에게로 가 살구가 얹어진 페이스트리와 고기파이를 샀다. 아는 맛집이 없으니 그런 풍경이 그곳의 명물인지 아닌지 모를뿐더러 그냥 길에서 붕어빵 파는 아저씨와 같아 친근함에 빵을 샀다.
빵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으니 하마터면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시큼, 상큼한 살구 맛에 꿀이 얹어져 달달하며 아래 기름진 페이스트리와 잘 어우러졌다. 어렸을 적 좋아하던 만화 ‘요리왕 비룡’을 보면 음식 한 입 베어 먹고는 음식에서 빛이 난다는 둥 갑자기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는 둥의 리액션을 보곤 했는데 정말 그런 맛이었다. 고기파이는 요즘 말로 '겉바속촉' 했다. 파이의 바삭한 겉 부분을 살짝 뜯어내어 벌리면 외국 특유의 소스로 갈색의 부드럽고 촉촉한 속이 빼꼼 얼굴을 비추며 ‘나를 얼른 먹어주세요’라고 속삭였다. 차가운 편이었는데도 고기가 비리지 않았고 죽처럼 씹지도 않았는데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꼭 한국인들이 찾는 식당이 아니어도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에는 이유가 있다. 혹여나 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그들의 맛을 느껴보는 것이 여행이지.
버스에서 내려 세븐 시스터즈까지 걸어가는 길은 상상도 못 했던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전까지 내가 겪었던 여행과는 사뭇 달랐다.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유럽 건축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빨간 머리 앤이 사는 초록지붕 집이 보일 것만 같은 여러 언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길에는 풀, 나무, 산책길, 울타리 그리고 동물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토끼 떼, 양 떼, 소 떼를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니 남들은 1시간 걸린다는 코스를 2시간이나 걸려 도착하였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끝에 바닷가가 나타났다. 자갈밭 해변에 서서 7개의 새하얀 절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모두가 말하듯 장관이었다. 내가 관광명소 세븐 시스터즈를 미리 찾아보고 사진으로 예고편을 보았다면 처음 보는 그 풍경이 상쾌하게 마음속 깊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의도하지 않은 나의 게으른 성향 덕분에 새로운 장소를 온몸에 시원한 바람이 스며드는 느낌으로 마주할 수 있었으며 가는 길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조차 늦었다. 남들 두 시간 걸리는 코스를 중간에 길까지 잃어버려 왕복 5시간으로 대장정을 마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막차도 놓칠 뻔했다. 그곳에서 하루 묵고 갈 숙소를 찾아야 하나 하루 머물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 등의 온갖 걱정으로 버스에서는 가만히 앉아있지조차 못했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심장이 멈출 만큼 정신없이 기차역까지 질주했다. 다행히 1분을 남겨놓고 돌아오는 기차를 헐레벌떡 탈 수 있었다. 시원한 날이었지만 기차에서 동생과 나는 땀으로 샤워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서로의 모습을 보며 누가 더 달리기가 느렸는지 낄낄거리며 놀리기 바빴고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유럽 여행’을 생각하면 제일 처음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자주 늦는다. 가끔 내가 게으르고 계획없이 여유로운 것이 잘못된 걸까 잠시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것 같다. 그저 그 시간과 순간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싶어서, 소중하고 간직하고 싶은 공간을 눈에 가득 담고 싶어서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들을 마주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어서, 그래서 그런 거다.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불안하더라도 그 길에는 재밌고 흥미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좀 뛰면 어떤가. 그 과정에 많은 것들이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