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by 인터파크 북DB

5

130년 된 이 집은 그의 세계보다 그녀의 것에 가까웠다.


나는 낡은 창틀에 걸린 하얀색 커튼을 바라보았다. 커튼을 흔들자 햇빛 사이로 먼지가 털려나왔다. 집안 먼지의 대부분이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각질 때문이란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이 집의 먼지 역시 내 몸이 만든 것일 터였다. 뉴욕에 오기 전, 재개발 직전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오래된 집에는 먼지가 더 많이 쌓인다.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왔을 때 이 집은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곧 착시 현상이고, 낡은 것을 소중히 다루었을 때 생기는 광택이라는 걸 알았다.


깨끗하게 세탁된 베개와 커피 잔이 가득 들어 있는 찬장, 유리 창틀을 바라봤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식기와 12곡물선식이라고 적힌 봉투, 유기농 밀가루, 현미와 검은콩이 들어 있는 병의 숫자들을 헤아렸다. 누군가 물건의 위치를 조금만 옮겨도 집안의 모서리가 기울 것 같았다. 수건이나 탁상시계, 작은 그릇들이나 유리 화병은 그곳이 반드시 자기 자리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책은 제목이나 장르에 상관없이 색깔과 키 순서로 정리되어 있었고, 신발은 종류에 상관없이 굽 높이에 따라 구별되어 있었다.


집 안에는 그녀만의 분류표가 존재했다. 나는 신발장을 열어 유독 굽이 높은 그녀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서랍장을 열면 속옷과 양말, 머플러가 색깔과 소재 별로 각을 맞춰 일렬로 정리되어 있었다. 집 안의 수건과 속옷, 침구류와 식기는 하얀 색깔이었다.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강박이 집 안에 가득했다. 그녀는 빨래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빨고, 도 빨아도 계속해서 빨 것이 쌓이는 사람…….


애초의 계획이 흐트러졌다.


그가 자신의 컴퓨터에 기록한 즐겨찾기 목록들이나 숨겨진 편지, 오래된 일기장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조금씩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사용한 물건들과 그가 즐겨 듣는 음악과 영화 저장 목록에서 취향과 습관을 발굴하려던 계획은 중단됐다. 무엇보다 외도 중인 남자 특유의 조심성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편지를 한 장도 남기지 않았고, 일기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한 건 그의 편지가 아니었다.


짜다 만 스웨터 바구니 안에서 내가 발견한 편지는 남자의 것이 아니라 여자의 것이었다. 그것은 절박한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헤아릴 틈 없이 마구 써내려간 글이었다. 애처로울 만큼 노골적이었고, 그래서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너덜대게 했다. 편지는 세 부분으로 찢어져 쪽지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그것은 '물'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넌 늘 나를 젖게 해. 네 입술이 내 성기에 닿을 때마다 나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것 같아. 네가 내게 키스할 때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이 되어 마를 것 같지 않아. 네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울었을 때, 나는 네 눈물이 되어 증발해 버렸어. 너 때문에 나는 자꾸만 흘러가고, 사라져 버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다시 사랑했으면,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네가 날 떠나면 난 곧 말라 버리고 말 거야. 아니, 죽고 말 거야, 널 사랑해…… 제발.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사랑할 것 같아, 그래서 끔찍해, 널 사랑해…….


나를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나를 사랑해 줘, 나를 더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예뻐해 줘…….


편지의 모서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사랑해 줘. 나를 예뻐해 줘'라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패턴처럼 편지의 가장자리를 빼곡히 장식하고 있었다.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찢어버리는 편지의 형식이 말하는 건 한결 같았다. 그것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눈물겨운 고백인 동시에 분노에 찬 질문이었다. 어느 순간 잘못 누른 리플레이 버튼처럼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고, 반복되는 것들의 서글픈 숙명을 가지고 있었다. 반복될수록 멀어지고, 반복될수록 희미해지고, 반복될수록 그 힘으로 점점 더 빨리 사라져버리는.


창밖으로 건너편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고양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잘 보이지 않을 검은색이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짜다 만 스웨터를 잡아 올렸다. 스웨터의 가슴 부분은 안뜨기를 하면서 너무 잡아당겨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결이 빳빳해져 있었다. 하지만 왼쪽 팔의 윗부분은 너무 헐거워 1센트짜리라도 곧장 빠져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안뜨기와 겉뜨기를 교차하며 뜬 스웨터의 조직을 바라보았다. 스웨터는 조직의 결이 엉망이었다.


서머타임이 끝난 11월에는 생각보다 어둠이 빨리 밀려왔다. 언제 어두워졌는지 모른 채 밤이 지나가는 날이 많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한쪽엔 스웨터를, 한쪽에는 그녀가 쓴 편지를 든 채 서 있었다. 뉴욕에 오기 전, 전남편과 마지막 통화를 하고 이렇게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발등에 커다란 못이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 어둠이 왔는지도 기억에 없다. 신혼 시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스웨터를 뜬 적이 있다.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시간들이 따뜻한 가을 스웨터로 조형될 수 있다면 그 사랑의 끝도 나쁘진 않을 것이란 생각 하나로. 5년을 연애한 끝에 한 결혼 생활도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데도, 무기력하게 모든 관계가 끝장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둠이 언제 스며들었는지 알 수 없었단 핑계로 서머타임이 적절하지 않단 건 나도 안다.


나는 가까스로 초록색 뱅커스 스탠드를 켰다. 빛이 들어오자 잠복했던 어둠이 물러나며 출렁였다. 나는 빛을 좇으며 그녀가 정리한 것들을, 이름표가 붙어 있는 병의 숫자나 커튼 끝에 수놓은 작은 하트를 세었다. 45개의 하트는 정상적인 자궁 안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등이 솟아올라 조금씩 굽어 있었다. 하트의 숫자를 세는 동안 신발장을 열어 그와 그녀의 신발들을 관찰했다. 모두 17개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 운동화 옆에 놓여 있는 하이힐. 신발장은 키가 큰 누군가에게 가닿기 위해 유독 발꿈치를 들어 올린 사람이 가지는 위험천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의 집에 온 지 2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시간은 이제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먼지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먼지를 털 듯 시간을 털면 몸 안이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시계를 보지 않았다.


12월 14일.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의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커다란 운동화에 발을 넣으니 운동화를 신는다기보다 발이 운동화에 잠긴 기분이었다. 낮 기온이 16도를 넘어서는 봄 같은 날씨였다. 헐렁한 신발 때문에 발고랑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고 그의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X자가 아닌 - 자 모양으로 신발 끈이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걷는 밤'이라는 그의 사진이 떠올랐다. 두 개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포개져 커다란 발 모양처럼 보이는 사진이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동네 카페엔 루이 암스트롱이 부르는 캐럴이 흘러 나왔다. 빵집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예약 판매한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70퍼센트 세일을 알리는 빨간색 현수막이 걸린 가구점 앞에 긴 줄이 보였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윌리엄스버그 푸드’에 들렀다. 그곳에서 브루클린 라거 3박스와 Cage free 달걀 한 박스, 아몬드 한 통을 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고 나오느라 남은 동전은 계산원에게 팁으로 주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윌리엄스버그에는 남자 운동화가 분명한 커다란 신발을 신고 어기적대며 걷는 여자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은 없다. 지하철 L라인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도, 신호를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도, 갈 길이 급해 저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동네였다. 하지만 비좁은 나무계단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동안, 그곳의 세입자 한 명이 나를 바라보며"도와줄까?"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괜찮아. 고마워!"라고 소리 질렀다. 타인의 질문에 분명히 대답한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건 근사한 일이다. 지하철에서 무거운 짐을 들어주던 사람을 만나거나,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을 찾아주는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었을 때 함께 걸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 말이다.


그는 길을 잃은 내게 길을 알려주었다. 맨해튼 이곳저곳이 보수 공사 중이었다. 39번가부터 꽤 긴 거리를 우리는 공사 중 소음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그와 나 사이엔 처음부터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30번가의 좁고 어두운 계단을 함께 걸어 올라갔다. 그때 나는 그의 왼쪽에 있었다. 숨소리가 더 잘 들리는 쪽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왼쪽에 자신의 몸을 뉘었을 것이다. 그의 왼쪽에서 공부하고, 그의 왼쪽에서 말하고, 그의 왼쪽에서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왼쪽 베개에 붙어 있던 곧고 긴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나는 곧 사라져 버릴지 모를 그녀의 왼쪽 세계를 상상했다.


사랑이 여간해서 멈춰지지 않는 것이라면 이별은 어떨까.


둥글게 말린 회색 털 뭉치와 완성되지 못한 스웨터를 발견한 순간, 나는 골똘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집 안의 모든 사물들이 내게 속삭이던 소리의 볼륨을 줄였다. 스웨터를 쥔 순간 소리는 사라졌고 풍경은 정지되었다. 나는 점점 고고학자이길 포기했다. 스웨터가 놓여 있던 저 상자 안에는 회색과 붉은색, 주황색과 올리브 그린 털실들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이었다. 며칠 동안 다가서지 못한 그 박스 안에서 나는 스웨터를 꺼냈다. 그리고 내 몸 위에 스웨터를 대보았다. 팔 길이와 품을 보아 남자 스웨터일 게 분명했다. 그것은 반도 떠지지 않은 채 바구니 안에 돌돌 말려 있었다. 스웨터 안에는 형체를 파악하기 힘든 그림과 도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예정대로 완성됐다면 그것은 그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전나무와 루돌프가 그려진 크리스마스 스웨터. 나는 그녀가 스웨터에 짜려다 멈춘 그림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배꼽 위에서 사라진 나머지 스웨터의 완성된 모습을 상상했다. 뜨지 못한 스웨터는 누군가의 잘려 나간 몸처럼 애처로워보였다. 나는 스웨터를 왼쪽 뺨에 조심스레 갖다 대었다. 털 뭉치에선 낡은 먼지 냄새가 났다. 마르지 않은 눈물 냄새가 이런 걸까. 나는 박스 안에 꽂혀 있던 바늘을 손에 쥐었다.


누군가 멈춘 일을 다시 시작하는 일. 털실에 묻어 있던 눈물 자국을 좇아 읽는 일. 짜 넣었던 실을 풀어 그것의 처음과 끝을 다시 잇는 일, 완성되지 않은 스웨터를 다시 짜는 일, 그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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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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