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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을 열었다.
'Cage Free'라고 적힌 종이박스 안에는 달걀 세 개와 '브루클린 라거' 세 병이 남아 있었다. 가스의 버튼을 돌리고 물을 끓였다. 냄비에 달걀을 모두 넣었다. 삶은 달걀 세 개와 브루클린 라거 세 병. 저녁 식사로 나쁘지 않았다. 아이폰을 도킹시킬 수 있는 스피커의 볼륨을 높였다. 계절이 바뀔 때 즐겨 듣는다고 말했던 카를라 브루니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식료품으로 가득 차 있던 냉장고 안은 내가 머문 나흘 동안 거의 비어 있었다. 마켓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맥주 한 병을 따고 그들의 방을 산책했다.
헤어질지 모를 오래된 연인들의 방은 주중의 한적한 공원처럼 늘 비슷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바라보면 경이로운 어떤 풍경을 전달해 왔다. 나는 가끔 돌부리에 걸린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5분 후 눈을 뜬 다음, 그의 입술이 닿았을 컵과 머리카락이 스쳤을 베개와 책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직접 만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막 발굴에 성공해 모든 흔적들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움이 가득한 고고학자처럼 주변을 그저 맴돌았다.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듯 방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방의 어떤 곳은 때로 위험구역처럼 느껴졌다.
나는 방 안이 그대로 보존되길 바랐다. 청소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낮의 햇빛 속에 먼지가 풀풀 날아올라 그의 방을 감싸는 풍경 안에 서 있었다. 시간에 따라 흩어질 정경을 상상하면서, 나는 이곳에서 나흘을 더 보냈다.
이 집에서 보내는 동안, 정체불명의 멍들이 생겼다. 늘 조심스레 다녔기 때문에 어딘가에 부딪힌 기억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무릎과 팔의 멍 자국은 보라색으로 더 선명해졌다. 어느 날부터 그것이 내 몸에 생긴 그림자처럼 보였다. 눈을 감으면 몸 안의 멍이 다리와 발가락 밑을 흘러 조금 기울어진 이 집의 나무 바닥을 적시는 것 같았다. 발밑이 늘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수건으로 발을 닦아도 발에선 습기가 가시지 않았다. 음악을 틀어도 방 안에선 시계 초침 소리가 노인의 기침 소리처럼 밭게 들렸다.
가스레인지 옆에 서서 달걀이 익길 기다렸다. 불을 끄고 서서 찬물로 달걀을 씻고, 달걀껍질을 깠다. 나는 티슈 위에 하얀색 달걀껍질을 부셔 조금씩 뿌렸다. 그리고 매끈하게 반짝이는 달걀 표면을 관찰했다. 만약 세계가 막 까놓은 삶은 달걀의 표면 같다면 어떠한 균열 없이 평온할 것이다.
강의실에서 가끔 그는 수영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상대방이 전혀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투명해 보였다. 나는 우리 세 사람의 시선이 조금도 부딪히지 않고 빗겨나가는 풍경을, 가망 없는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 특유의 조급함을 낱낱이 목격했다. 그러므로 매혹이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의 냉담함에서부터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강의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때, 그가 말했었다. 희망 없이 사랑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만이 순수한 고통을 주고, 순수한 고통만이 예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몸에 일부러 상처를 만들고 그것을 날인하고 증언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도 말할 때, 그의 눈은 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온 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찍는 사람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을 쉽게 알아보기 때문이었다. 비오는 날 찍힌 그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대어본 적 있는 사람은, 좋아한다는 말 대신 그녀의 립스틱이 희미하게 찍힌 머그 컵 위에 자신의 입술을 대어본 사람이라면, 어떤 것으로도 멈춰지지 않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남자를 짝사랑한 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의 키에 맞춰져 있는 의자에 맞춰 발꿈치를 들어 올리자 이내 무릎이 떨렸다. 나는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물건은 깨끗하게 써주세요. 다툰 적이 있거든요. 남편이 자기 물건에 특히 애착이 많은 사람이에요."
by 백영옥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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