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by 인터파크 북DB

2

집은 가로가 좁고 세로가 긴 레일로드 형태였다.


집세로 악명 높은 뉴욕이나 홍콩에선 흔한 형태였다. 하지만 각 방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달려 있는 건 꽤 특이했다. 주인이 오래된 자신의 집을 월세 전용으로 바꾸며 여러 개의 방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기이하게 구조가 일그러진 것 같았다.


공간은 크게 두 곳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한쪽 방에는 책상과 모니터, 사진을 뽑을 수 있는 대형 프린터가 놓여 있었고, 이케아에서 산 싸구려 조립식 책장 안에는 사진집과 책이 꽂혀 있었다.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책장 끝에는 스트랜드 서점 마크와 16달러 가격표가 붙어 있는 마그리트와 호퍼의 화집이 놓여 있었다.


나는 <순수 박물관>을 펼쳤다.


그가 지하철에서 읽고 있던 책이었다. 그의 옆에는 등과 배에 칼이 꽂힌 뚱뚱한 배트맨이 앉아 있었다. 할로윈을 이틀 앞둔 날이라 맨해튼으로 나가는 지하철 안에는 할로윈 분장을 한 우스꽝스러운 뉴요커들이 북적댔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고 있을 때, 그는 분홍색 어그 부츠를 신고 스티로폼으로 만든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와 흑인 배트맨 사이에 앉아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무릎이 조금씩 떨렸다. 책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다가 우는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메이'가 내 옆에 있었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실연당한 게이일 거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북적이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눈물이 떨어지기 전,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떨리는 무릎의 진동을 내 손끝으로 멈추고 싶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가 읽고 있던 <순수 박물관>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며칠을 기다려 읽은 책은 삶의 조건이 뒤바뀌는 어느 순간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이 완벽했던 삶에 균열이 생기는 찰나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가 읽고 있던 책을 가슴에 안았다. 손끝으로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그가 기꺼이 묻혔을 무수히 많은 지문들을 떠올렸다. ??순수 박물관??의 321페이지에는 서점 이름이 적힌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결말을 그는 알지 못할는지도.


방을 서성이다 잠겨 있던 문 하나를 더 열었다. 거실과 침실, 부엌이 함께 있는 방에는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침대와 칼로 깊게 긁힌 자국이 선명한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가 앉았을 의자에 앉아, 그가 마주했을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분홍색 포스트잇 세 개와'between'이라고 적힌 푸른색 포스트잇 하나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나는 단어가 적힌 포스트잇을 떼어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구김 없는 침대보에선 희미한 샤프란 냄새가 났다. 침대 위에는 두 개의 베개와 하나의 커다란 쿠션이 삼각형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천장 위를 바라보자 세 개의 전구가 나간 오래된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어쩐지 모든 게 제자리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그. 그녀. 나.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지 1년 8개월 만에 나는 그의 집에 와 있었다.


3

그는 내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지난봄, 우리는 맨해튼 30번가 근처의 NYU 부설 아카데미에서 함께 강의를 들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자유로운 형식의 강의였다. 뉴욕에선 흔하게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의 아카데미판인 셈이었다.


"3주일 후네. 과제 끝나는 기간이잖아. 돌아가면서 자기 작품도 발표하고 많이 도움 될 것 같지 않아?"


남자친구의 페이스북에서 강의 정보를 알아낸 건 일본인 룸메이트인 메이였다. 나는 가만히 메이를 바라봤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메이는 늘 말없는 상태의 나를 좋아했다. 내가 계획 같은 걸 미리 세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던 것도, 이혼했던 것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쓰고 유학을 온 것도 전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사촌 언니가 2주에 한 번 그곳에서 강의를 하게 됐나봐. 첼시에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거든. 어제 통화했는데 나한테 꼭 들어보라고 하더라. 너랑 말이 아주 잘 통할걸?"


메이가 크게 웃었다. 그러나 3주 후, 강의에 나가기 시작한 건 시각 디자인을 공부한 메이가 아니라 나였다. 삼청동에 있는 작은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내가 비주얼 아티스트들과 함께 강의를 들은 이유를 찾자면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당시 나는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1년 동안 한 무리의 기러기 엄마들과 함께 교육심리학 강의를 들어야 했다. 그들에게서 1년 동안 내가 들은 가장 큰 테마는 아이들 대학 보내기와 현지에서 만난 남자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서른 살 생일을 맞이했다. 혼자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켜던 순간, 내가 지난 3년 동안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겐 남편도 아이도 없었고 당연히 남자도 불륜도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감정이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절망인지, 슬픔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 내가 법정에 서서 이혼 도장을 찍은 건 분명했다.


메이는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선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헤어진 남자의 첫 번째 이니셜을 자신의 오른쪽 등 뒤에 차례로 새겨 넣었다. 알파벳이 열한 개로 늘어났을 때, 그녀는 내게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11명의 남자. 11번의 이별. 1이 두 개 겹쳐 있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메이는 내가 찍은 사진을 좋아했다. 뉴욕에 온 지 5년 만에 메이는 11명의 남자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 대문 사진으로 걸어놓았다.


"메이, 문신은 쉽게 지울 수 없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래도 내 몸에 담배 빵 만드는 것보단 문신 쪽이 더 뉴욕적이잖아?"


메이의 말대로 모든 사랑은 우연의 소산인 걸까. 내가 알고 있는 건, 누구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로 되돌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싫어했던 사람을 불현듯 좋아하게 되는 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었다. 강의실에서 그와 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도, 그의 아이폰과 내 아이폰이 바뀌었던 것도, 아이폰에 저장된 그

의 사진들을 본 순간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두 번째 그를 봤을 때, 그는 뭔가를 찍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벽 위에 붙어 있는 아이비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뭇잎과 벽에 반사된 빛을 찍고 있었다. 빛의 형태를 일정한 프레임 안에 가두고, 그것을 소리로 채집해 표현하는 작업이 그의 관심사였다.


"미스터 셰도우!"


몇몇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 별명을 불렀다.


뉴욕에 와서야 나는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종이 다를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다양한 혈족 관계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머리와 눈동자 색깔이 따로 명시되어 있는 운전 면허증을 보는 일이나, 다양한 억양의 영어를 듣는 일에 익숙해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식어버린 에스프레소에 커다란 각설탕 하나를 넣어 스푼으로 온전히 휘저어 녹이는 일처럼 느껴졌고, 때때로 뉴욕 지하철이 서울 메트로만큼 쾌적해지길 바라는 일만큼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메이가 사촌언니 얘기를 했을 때, 나는 그녀가 당연히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김수영.


그녀는 첫 강의에서 자신의 한국 이름을 칠판에 썼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한국에서 전위적이고 강렬한 시를 썼던 시인과 같은 이름이며, 영어로'Swimming'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얼마나 물을 좋아하는지,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미시건 호수에서 발가벗고 했던 수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한국에선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사주'라는 강력한 삶의 지도가 생기는데 자신에겐 물을 뜻하는 '水'가 두 개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하루에 4리터가 넘는 물을 마신다고도 말했다. 그러니 자신과 친해지려면 카페가 아니라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리는 게 좋을 거란 농담을 하다 웃었다.


나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생기는 건 필연적인 빛 때문이다.


'빛'을 찍는 남자에게 '그림자'라는 별명을 지어준 건 메이의 사촌 언니 수영이었다.


by 백영옥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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