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 (진하게)
1
집은 삼중으로 잠겨 있었다.
그녀가 내게 준 집 열쇠는 모두 세 개였다. 첫 번째 열쇠를 돌려 흰색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문을 열면, 문고리가 망가진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130년이나 됐다는 집의 문고리를 열면 삭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누르듯 스쳤다. 3층까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쉬지 않고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문 열쇠에 푸른색 하트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어요."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그녀는 내게 열쇠 구별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푸른색 스티커가 붙어 있는 열쇠를 보았다. 열쇠를 쥔 엄지손가락으로 수없이 문대졌을 하트였다.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문이 열렸다.
1) 12월 24일에 돌아옵니다. 열쇠는 오전 12시 이전에 1층 주인집에 맡겨주세요.
2) 침대와 베개 시트는 돌아가기 전, 집 근처 ‘Jenny Cleaners’에 맡겨 세탁해주세요.
3)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은 전부 드셔도 됩니다.
4) 낡은 집이라 전기배선이 좋지 않습니다. 밥솥과 전자레인지, 토스터나 헤어드라이어를 동시에 돌릴 경우 퓨즈가 나갈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냉장고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는 '주의사항'이라고 적힌 글이 붙어 있었다.
그가 쓴 것은 아니었다.
그가 노트에 쓴 글씨를 본 적이 있다. 잘 나오지 않는 볼펜으로 힘을 줘 눌러 쓴 가늘고 긴 글자들이었다. 검정색 몰스킨 노트에는 알 수 없는 단어와 추상화된 기호, 그림들이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노트를 훔쳐볼지 모른단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쓴 글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쓴 글은 달랐다. 글자는 정갈했고 유독 한글 맞춤법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다.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한 달 전, '서블렛(sublet)'을 구하는 사이트에 그녀가 올린 집 설명 역시 그랬다.
'윌리엄스버그. 베드포드(Bedford) 지하철역에서 8N 방향, 도보로 2분 거리. 동남향 3층. 지하철 L라인. 맨해튼까지 한 정거장. 렌트 2400달러. 가구와 침구 식기 포함. 금연의 미혼여성 구함. deposit 500달러. 인터뷰는 전화로 대신합니다.'
윌리엄스버그의 베드포드는 이제 관광지에 가까웠다.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정도로 카페와 레스토랑, 바가 밀집해 있었다. 부동산 폭등세는 점점 심각해졌다. 월세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2배가 넘었다. 하지만 나는 서블렛 사이트에서 글을 확인한 후, 곧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건 그녀였다. 나는 한 달 동안 쓸 집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한 달 동안,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도 잊지 않았다. 여행자가 아닌 유학생이 왜 서블렛을 구하려고 하는지 정도의 구실은 있어야 했다.
"예치금 500달러 괜찮으세요? 룸메이트가 이전에 서블렛을 놨다가 전자레인지를 고장 낸 사람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거든요. 이건 제 조건은 아니니까 예치금이 부담스러우면 얘기하세요."
다른 사람의 조건이라면, 그가 내건 조건일 것이다.
"어차피 받을 돈이잖아요?"
내가 말했다.
서블렛(sublet)은 누군가에게 빌린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걸 의미했다. 빌린 것을 다시 빌려주는 이런 미국식 제도는 유독 긴 여름방학 동안 고향에 가거나 여행을 떠나는 유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당연히. 돌려드리죠."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고 낮았다. 말끝에 긴 한숨이 이어지다 뚝 끊어졌다. 한숨을 내쉬는 건 고치지 못한 악습 같았다.
가끔 그녀의 얼굴을 상상했었다.
그와 그녀가 부엌에 서 있는 모습을, 그녀가 와인을 졸여 스테이크용 소스를 만들고, 그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그의 오른쪽 심장과 그녀의 오른쪽 심장이 한쪽 방향으로 나란히 포개어지는 모습을, 그들이 서로의 목덜미에 키스하고 셔츠를 끌어내려 성급히 부엌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 말이다. 그와 함께 공부했던 여자, 1년 9개월째 그와 동거 중인 여자,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여자.
"200달러만 받을게요. 아무래도 너무 많네요."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던 건 그 정도259840394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였다.
나는 알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by 백영옥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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