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보다는 많이 높지만, 이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한국 미인과 마주치는 확률보단 훨씬 더 낮으니까요."
그의 손은 아주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카탈로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외국인 억양이 전혀 없는 미국식 영어를 구사한다. 누구도 내가 말하는 언어로 국적을 짐작할 수는 없다. 내 몸 어디에도 한국인이라는 표식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죠?"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뉴욕에서 홍콩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오는 동안, 맛없는 기내식과 건조한 실내 공기, 재미없는 기내 영화 때문에 심신이 피곤했다.
"오로라는 환한 보름달이 뜨면 당장 숨어버리지만 돌고래들은 보름달을 정말 좋아해요. 5일 뒤엔 보름달이 뜹니다. 아주 큰 보름달이에요."
나는 군데군데 백발이 성성하고 눈가에 주름이 깊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세 번째 ‘보름달’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내가 조금 전 다시 꽂아 넣은 투어 안내서를 선물처럼 건네주었다. 강요하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핑크 돌고래 투어는 제가 특별한 손님들에게만 추천하는 프로그램이에요. 홍콩의 대형 쇼핑몰에 지친 사람들에겐 아주 낭만적이거든요."
똑같은 자리에 앉아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같은 일을 반복하면, 어떤 사람은 한 분야의 장인이 된다. 아마도 남자는 이 호텔, 이 자리에 앉아,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옛 마을의 당산나무처럼 이곳을 지나다니는 투숙객들을 지켜봤을 것이다. 그는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 여행자의 마음을 읽는 기술을 터득한 것 같았다.
나는 마을을 지키는 거대한 느티나무처럼 몸집이 큰 남자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그가 건네주는 투어 프로그램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핑크 돌고래 투어의 프로그램 란에 이름을 적었다. 정보란에 원하는 것들을 기입하다가 ‘타이오’라고 불리는 어촌 마을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바나나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 돌고래를 보는 프로그램 옵션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바다에 머무는 시간과 횟수가 늘어나면 핑크 돌고래를 볼 확률도 조금 더 올라갈 것이다.
"아주 좋은 선택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타이오 마을이 홍콩에서 옛 어촌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며, 바나나 보트가 뒤집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하다가 크게 웃었다. 만약 보트가 뒤집어진다고 해도 구명조끼를 입은 채, 핑크 돌고래와 수영을 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 그 역시 좋은 일이라고 했다.
"이번 달은 슈퍼문이에요."
"슈퍼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문은 평소에 우리가 보는 달보다 16퍼센트 더 크고, 30퍼센트나 더 밝게 빛나죠. 정말 눈앞에서 켜진 전구처럼 선명한 달의 모습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슈퍼문이 뜨는 날엔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춰요. 그때 마을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남자와 여자가 눈을 맞추고, 밤이면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죠."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바로 자신이 그런 달빛에 홀려 춤을 췄던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슈퍼문은 과학적인 현상일 뿐이다.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달의 궤도가 타원형이기 때문에 지구와 달의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보름달이 뜨면 그것이 과학자들이 정의하는 슈퍼문이 된다.
무엇보다 슈퍼문은 불길한 현상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우주쇼 앞에 서서, 아름다움 이전에 본능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다. 짙은 어둠이 덮고 있던 시야가 휘몰아치듯 강력한 달빛으로 열리면,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낮같은 밤하늘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슈퍼문은 그들에게 곡식과 땅이 말라붙는 가뭄,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지진, 피할 수 없는 폭우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제복을 입은 이 남자가 내게 하는 낭만적인 말은 사실과 좀 다른 얘기들이었다.
그때, 라이언이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마리!"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가 유별나게 컸기 때문에 몇 몇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름이 마리였군요."
가짜 이름을 쓰는 여행자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나는 그가 핑크 돌고래 투어 리스트 이름 란에 적혀 있던 '조성주'라는 이름을 분명히 봤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친근하게 웃었다.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마리!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어서 달려왔어."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 전문보기
by 백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