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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16. 2016

내 덕이 넘치나이다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 카피라이터이자 카투니스트인 루나의 독립생활 이야기가 매주 목요일 북DB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 편집자 말


덕후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가슴에 소용돌이가 생긴 것처럼, 출렁이는 온 마음이 한 지점으로 빨려들어가버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삶이 오직 한 존재를 향해 회오리치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든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좋아함에 겨워 대상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모두 파악하고 싶고, 그것에 대해 혹여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봐 조바심에 허덕이곤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일종의 덕후 유전자, 줄여 말해 덕전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런 덕전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만화에 빠져 만화책을 사 모으고, 만화동아리에 가입하고, 일본어를 공부하고, 원서를 사서 보고, 손수 패러디 만화를 그리는 등 덕력을 발휘한 바 있다. 또 한때는 홍콩 영화에 빠져 온 방을 이연걸과 주성치의 사진으로 도배하고, 청계천 뒷골목을 떠돌며 '정무문'이니 '도학위룡'이니 하는 비디오테이프들을 사다 모은 적도 있다.

그리고 가장 심각했던 건 어떤 연예인에게 빠져 있을 때였다. 이런 수년에 걸친 팬 생활은 해당 연예인의 반영구적 활동중단으로 마무리되었는데 나는 당시 몹시 애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퍽 후련해했다. 다시 그를 볼 수 없음이 사무치게 슬펐지만, 온 마음이 소용돌이쳐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닫혀 내심 기뻤다. 이제야 잔잔한 나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생까지 저당잡혔을 정도로 강렬했던 이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후로는 무언가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덜커덕 마음의 제동장치가 작동한다. 다시금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은 지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도 성실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힘껏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명이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진다.*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 딸들>)

새로운 덕질의 씨앗은 은행에서 비롯되었다. 정기예금이나 들까 해서 은행을 찾았는데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남자 직원이 나를 응대했다.

"고객님, 이번에 나온 상품인데, 프로야구 정기예금 어떠세요?"

"그게 뭔가요?"

"응원하는 구단을 정하고요. 그 구단의 순위가 작년보다 올라가면 고객님의 수익률이 올라가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제가 야구를 아무것도 모르는데…… 응원하는 구단을 어떻게 정하죠? 올해 어느 구단이 잘할까요?"

"올해는 엘지 트윈스가 잘할 겁니다. 작년에 아주 못했기 때문에 올해 작년보다 치고 올라갈 가능성이 높죠."

서글서글했던 그의 눈이 '엘지 트윈스'를 이야기하며 미세한 광기를 띄었음을 내가 감지했어야 했다. '작년에 아주 못했기 때문에 올해는 잘할 것'이라는 예측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도 파악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둔감함은 그것을 무심히 넘겼고 나는 '응원구단' 칸에 ‘엘지 트윈스'라고 또박또박 써내고 돈을 예치했다. 은행 볼일을 보고 사무실로 돌아온 내가 주변 동료들에게 엘지 트윈스에 자산을 걸었다고 말했더니 사방에서 모터처럼 혀를 찼고 기관차처럼 한숨을 쉬었다. 모두 나에게 속았다고 했다. 계약 10분 만에 실패한 투자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나는 엘지 트윈스가 잘하기만을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내 자산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별수없이 경기 결과를 흘낏거리게 되었고 야구 지식을 주워 삼키게 되었고, 급기야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야구장 나들이까지 가게 되었다. 전 국민의 축제인 월드컵 시즌에도 미온적 태도로 일관해온 내가 스포츠에, 그것도 개인도 아닌 구단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야구장에 온 나에게 누가 댁은 어디 팬이냐고 물어오면, 그냥 치킨 먹고 맥주 마시러 왔다고, 치킨 냠냠스나 맥주 꿀꺽스의 팬이라고 답했다.

이런 식의 방심이 나의 제동장치를 해제한 게 틀림없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팀 내 모든 선수들의 스탯과 응원곡을 외우고 있었고, 매일 저녁 6시 20분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퇴근길 야구 시청을 위해 휴대폰 요금제를 바꿨으며, 저녁 약속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야구 경기를 보다 엘지 트윈스에서 실책이 나오면 불벼락처럼 욕을 하기 시작했고, 노장 선수의 투혼엔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진 날은 진 게 슬퍼 맥주를 땄고, 이긴 날은 이긴 게 기뻐 맥주를 땄다. 매일같이 야구 기사를 탐독하면서 어느 날 엘지 트윈스의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에 욱하여 신고 버튼을 누르며 깨달았다. 나 지금 뭐하는 거지? 나의 덕전자가 발동하고 말았구나.

나는 이미 늦어버렸구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살금살금 불어난 애정이 마음의 제방을 허문 모양이었다. 아뿔싸. 나는 이미 한 명의 훌륭한 야빠였다. 내가 나의 덕전자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


※ 본 칼럼은 <혼자일 것 행복할 것>(홍인혜/달/2016)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내 덕이 넘치나이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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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홍민혜(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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