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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20. 2016

바보야, 문제는 멀리 내다보는 거야

왜 다시 도요타인가

         


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열심히 일하거나 빨리 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리 전문가 백종원은 프로가 아마추어와 다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로는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당장 급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닥친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프로는 시간을 두고 장기적 관점의 효율을 생각하고 최고의 효율을 내기 위해 일의 전체를 설계할 줄 안다.


모바일 메모 앱 ‘에버노트(Evernote)’의 창업자 필 리빈 CEO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 <느림의 지혜(The clock of the long now)>라는 책을 꼽았다. 1만 년 동안 작동할 시계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는 “왜 에버노트가 앞으로 100년 가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되겠다고 했는지 그 이유가 이 책에 다 들어 있다”면서 “재빠른 것이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정말 해야 할 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했다.


그의 말 그대로 장기적 관점에서 정말 해야 할 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바로 ‘설계’다. 2016년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반상대결이 있었다. 알파고가 이겼는데,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알파고가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바둑의 인간 최고수를 이겼다며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정말 2년 만의 승리일까? 현재의 인공지능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과학자 앨런 튜링에서부터 비롯된 그간의 모든 연구 성과와 빛나는 전통이 담겨 있다. 그것이 영국의 인공지능 연구기업 딥마인드와 딥마인드를 인수한 구글로 연결된 것이다. 갑자기 잘하게 된 것이 절대 아니며, 알파고의 승리는 오랜 기간 축적돼온 설계의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과거에, 그리고 지금,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설계를 혁신할 때 그 역량은 미래로까지 연결된다.


도요타의 30년 시선 경영


설계의 경쟁력은 현재 시점에서 논하기가 어렵다. 대개는 현재의 차이가 훗날 각 회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알게 된다. 설계는 눈에 잘 안 보이는 부분이고, 언론 등에서 수치상으로 비교 분석하여 기사화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도요타의 신체제 개편과 극찬을 받는 설계 혁신인 'TNGA 전략'은 회사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아키오 사장이 고심 끝에 준비한 것이다. 신체제 개편을 통해 지속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선행(미래) 기술에 더 집중하고, TNGA라는 설계 혁신을 통해 자동차 개발과 생산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도다. 아키오 사장은 2016년 5월 실적발표회장에서 교도통신 기자가 "어느 정도의 기간을 생각하고 경영을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경영자라면 세상을 향해 앞으로 20~30년에 대한 커미트먼트(commitment, 약속)를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아키오 사장은 신체제 개편을 통해 본사 차원의 미래창생센터를 신설했고, 신설된 7개 컴퍼니 가운데 하나로 선진기술개발 컴퍼니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중 '미래창생센터'는 30년 앞을 내다보고 기술을 개발하고, 실리콘밸리나 다른 회사와의 제휴 등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간다. 아키오의 기술 부문 멘토이자 그룹 R&D·제품기획 총괄이었던 가토 미쓰히사 부사장이 센터장을 맡을 만큼 그룹 차원의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선진기술개발 컴퍼니'는 실무를 맡고 있는 7개의 컴퍼니 중 하나인 만큼 향후 10년 이내, 즉 차기 또는 차차기 모델에 넣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


독립성이 없으면 좋은 설계도 없다


도요타가 특히 선진기술개발 컴퍼니를 기존 조직에서 분리·독립시킨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미래를 대비하며 선행 기술을 개발하는 조직을 현재 조직 안에 집어넣으면 연구 성과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회사의 인력과 자금은 당장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쪽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아예 조직을 따로 떼어낸 것이다. 도요타는 조직 곳곳에 분산돼 있던 선행 기술 연구인력 1만 명 중 상당수를 선진기술개발 컴퍼니에 재배치함으로써, 이 분야에 대한 집중 개발을 노리고 있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1만 1,000명의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양산 기술을 개발하는 데 투입되고 있다. 순수하게 선행 기술을 담당하는 연구인력은 도요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도 돈 안 되는 일을 한다는 내부 인식 때문에 제약이 많다. 현대자동차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다. 설계 혁신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해도, 지금까지 장기적 관점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인력을 양성해왔기 때문이다. 상당수 한국 대기업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 


노무라종합연구소의 최고 브레인으로 꼽히는 고노모토 신고 본부장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과거엔 앞을 내다보려 노력했는데 지금은 남들이 뭘 하는지에만 신경 쓰는 것 같다”고 꼬집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는 1990년대 한국 기업들과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기업의 비전을 만드는 일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한국 기업은 '우리가 10년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대기업을 보면 타사 동향을 알려달라는 등 눈앞의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좀더 멀리 보면서 장기적으로 어떻게 투자하고, 경영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이제 눈앞의 것을 갑자기 바꿔서 급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노모토 본부장은 또 "한국은 반도체나 스마트폰 등 개별적인 하드웨어 제품력은 뛰어난데, 전체적인 협력을 통한 시스템 경쟁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면서, "서로 성격이 다른 대기업끼리라도 각각의 장점을 모아 통합된 시스템으로 세계에 수출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눈앞의 것을 갑자기 바꿔서 급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거에 한국은 반도체·액정패널·스마트폰·조선·전자·철강 등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리더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대규모 자금을 쏟아 부어 경쟁력을 갖춘 뒤, 강력한 마케팅과 해외영업을 통해 제품을 대량으로 판매하여 이익을 회수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일본에 비해 임금 경쟁력이 더 뛰어났다는 점, 또 일본이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 이후 대규모 투자를 기피해온 상황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3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한 덕분에 그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 기업과 기업 리더들은 향후 30년을 내다보는 설계를 해야 한다. 제대로 설계만 한다면, 지금 한국 내에 존재하는 자원만으로도 최강의 팀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기업이 큰 설계를 하기가 어렵다면, 팀을 이룰 수도 있다. 도요타는 이미 30년 시선으로 설계의 새 판을 짜나가고 있다. 지금 한국 기업들이 제대로 된 설계를 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을지 모른다.


※ 본 연재는 <왜 다시 도요타인가>(최원석/ 더퀘스트/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바보야, 문제는 멀리 내다보는 거야 ]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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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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