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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20. 2016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그날들> (윌리 로니스/ 이봄 / 2015년)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흑백사진을 본다. 스커트 차림에 구두를 신은 여성이 물웅덩이를 막 건너는 찰나를 담고 있다.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이 보이지 않고 허리 아래의 하반신만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의 주인공은 물웅덩이를 건너는 여성이 아니라 물웅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친 막대기 같은 것은 다름 아닌 파리 방돔 광장의 오벨리스크다. 내가 이러한 뒷이야기를 아는 건 프랑스 사진작가 윌리 로니스의 <그날들>을 읽은 덕이다. 같은 사진이 '방돔 광장, 1947'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로니스는 테살로니카의 아케이트를 소개하며 '모디아노'라는 이름을 언급한다. "그곳은 모디아노라는 시장이었다. 모디아노는 옛 살로니카 유대인 가문 이름으로, 이 도시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p.38) 그가 말한 모디아노는 이 모디아노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양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 모디아노가 이 모디아노가 맞지 않을까? 그래, 모디아노의 조상은 그리스에 살던 유대인 가문이었을지 몰라. 도시를 주름잡았을 거야. 와~


'일장춘몽 (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 꿈같다는 뜻이다. '봄꿈'이 라는 단어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지은 시 ‘화비화 (花非花)’에도 등장한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이 시에 감명을 받아 작곡한 음악이 ‘A flower is not a flower’. 꽃은 꽃이 아니라는 백거이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꽃은 꽃이 아니고 안개는 안개가 아니라네
깊은 밤 찾아와 날이 밝아 떠나간다 
찾아올 땐 봄꿈처럼 잠깐이건만 
떠나갈 땐 아침 구름처럼 흔적도 없어라


좋았던 것은 다 그랬던 것 같다. 봄꿈처럼 짧고 이별하면 꽃처럼 안개처럼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그만 허무한 심정이 되고 만다. 하지만 너무 짧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느낌은 실제로 그래서라기보다 영원불멸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데서 오는 상대적 상실감이 아닐까. 좋은 것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자아내는 감정은 기도(祈禱)보다 향수(鄕愁)에 가깝다. 좋았던 순간이 있었고, 떠올리면 고향을 상실한 것처럼 허전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고 만다. 그 허전함과 그리움이 오로지 이쪽에 남아있는 자의 몫인 것 같아 더욱 쓸쓸해진다. 향수란 본디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채울 길 없는 데서 비롯된 괴로움. 이럴 때 시간은 진공 상태에 머무른다. 숨이 막힌 다. 나가야 한다. 숨구멍을 찾아 밖으로….


윌리 로니스는 1945년 어느 날, 몽트뢰유에서 우연히 단장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 집시들을 본다. 그녀들의 몸짓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었고, 인화된 사진은 빛도 구도도 참 좋았다. 그가 이 사진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한 우연의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면 그것에 감사하자. 내가 ‘의외의 기쁨’이라 명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머리에 꽂은 핀처럼 사소한 상황들, 바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뒤에도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늘 준비해야 한다." - <그날들> 89~90쪽


봄날의 꿈처럼 짧고, 이별하면 꽃처럼 안개처럼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아 허무하다고 했다. 그러나 인생은 어차피 순간의 합이다. 그 순간들은 매번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더 훌륭하게 나를 담아냈다.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인생이 우연을 가장하고 내게 슬며시 아는 척을 해온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리고 '아무것도 없을' 사이에서 인생이 내게 의외의 기쁨을 선물해준 순간이었다.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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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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