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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27. 2016

대리할 수 없는 노동... '놉'을 아십니까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모암댁 엄니의 소식을 들은 건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이었다. 버스 뒷좌석에 앉은 마을의 젊은 청년(그래도 50살을 훌쩍 넘겼다)이 내게 알은 척을 했다.


"가을에 모암댁 엄니가 엄청 찾았는데, 어디에 있었어?"


시골의 버스 안은 경로당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노인들 세상이다. 청년의 우렁찬 목소리에 버스 안 어르신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청년보다 훨씬 젊어 '새파랗게 어린 놈' 축에 드는 나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엄니가 저를 왜 찾아요?"
"왜긴! 밤 따야 하는데 '놉'이 없응게 그렇지. 뭐했어? 동네 와
서 '놉'이나 좀 하지."


읍내에서 술을 한잔 하셨는지 청년의 목소리 데시벨은 낮아지지 않았다. 한 엄니가 눈은 나를 바라본 채 청년에게 물었다. 


"근디, 여그는 누구래?"
"누구긴, 우리 동네 놉."


다른 좌석에 앉은 엄니도 물었다. 


"누구 집 놉이요?"
"저그 모암댁!"
"어디에 사는 분이래?"
"몰러요. 암튼, 동네 놉이여!"


버스 안은 '놉'이라는 한 글자가 지배했다. 엄니들의 눈길은 계속 내게 쏠렸다. 버스 안에서 나는 '놉'이었다. '놉'이라는 말을 구례에 내려와서 처음 들었다. '노비'라는 말로 들리는 '놉'은 실제로 그 뜻도 좀 비슷하다.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밥과 술을 먹이고 날삯을 주어 일을 시키는 일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난 봄, 나는 모암댁 엄니 녹차밭에서 일했다. 종일 녹차잎을 따면, 그 판매 대금의 절반이 내 몫이었다. 사전에 나오는 대로 일당(날삯)을 줘야 하는데, 그렇게 했다가는 일 시키는 쪽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잦다. 가령 일당이 7만 원이라면, 농산물의 가격이 그에 한참 모자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시골에서는 일당 대신 '그날 수확물의 절반'을 주기도 한다. 일당을 주지는 않더라도 그런 일꾼을 통칭 '놉'이라 부른다. 


문제는 '놉'이 자꾸 '노비'로 들린다는 점이다. 작년 봄 모암댁 엄니와 일할 때도 이 점이 참 난감했다. 마을의 다른 엄니들이 나를 가리키며 "누구여?"라고 물으면 모암댁은 자랑스럽게 크게 외치곤 했다. 


"우리 집 ‘놉’이여, 놉!"


이 말이 내게는 노비로 들렸는데, 그 청각적 효과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귀촌자는 '놉'이라는 말이 싫어 마을 어른신들의 일을 돕는 걸 기피한다. 노비가 된 듯한 기분이 싫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버스 안에서 '놉'으로 통했다. 난감했으나, 마을 청년의 호기로운 알은 척을 외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야길 들어보니, 모암댁 엄니는 허리가 아파 올해 밤 농사 수확을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엄니의 넓은 밤나무 밭은 밤이 지천이었지만 그걸 줍고, 산에서 짊어지고 내려올 사람이 없었다. 결국 "다람쥐, 고라니가 엄니 밤으로 포식을 했다"고 마을 청년은 우렁차게 말했다. 


모암댁 엄니의 밭에는 지금 찬 겨울바람이 한가득이다


<대리사회>(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년)의 저자 김민섭씨가 직접 대리운전을 하면서 통찰한 대로 이 세상은 거대한 대리 사회다. 술을 마신 운전자만 타인에게 돈을 주고 운전을 맡기는 게 아니다. 어렵고, 힘들고, 거친 노동은 돈을 매개로 타인에게 맡겨진다.


세상에는 대리할 수 없는 노동이 있다는 걸, 지리산 아래 구례에 와서 알았다. 오늘날 농사는 그 누구도 대리하지 않는다. 농산물 가격이 싼 탓에 ‘놉’을 구할 수도 없고, 일당을 준다고 해도 일할 사람 자체가 없다. 허리 구부러진 노인들만 도저히 대리할 수 없는 노동인 농사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내가 지리산 피아골 마을의 인적 구성은 70~80대 어르신들이 주류다. 어르신들은 정해진 시간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스마트폰의 알람처럼, 규칙적으로 노동을 한다. 밤 수확이 끝나면, 감과 콩을 따고, 뒤이어 깨를 수확하고,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담그는 식이다. 일하는 어르신들은 불필요한 동작 하나 없이 매우 부드럽고, 요령 있게 일을 한다. 평생 같은 노동을 반복해온 사람의 정제되고 깔끔한 몸놀림이다. 


이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면 저 노동을 누가 대신할지, 궁금증보다 걱정이 앞선다. 귀촌자들은 대개 농사를 짓지 않는다. 내가 그랬듯이 텃밭 조금 가꾸다가 이마저도 힘들다고 포기하기 일쑤다. 본격적인 논농사, 밭농사는 거의 엄두를 내지 못한다. 


<대리사회>의 저자 김민섭은 책 후반부에서 말한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내가 그랬듯 밀려나고서야 자신이 어느 공간의 대리로서 살아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밀려난 개인은 잉여나 패배자로 규정되고, 그 자리는 새로운 대리인간이 들어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포위한 '대리올로기'의 서사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물러섰든 밀려났든, 나는 서울을 떠나 구례에 와서 더 많은 여유를 갖고 지난 삶과 도시의 일상을 돌아보게 됐다. 내 삶의 많은 부분 역시 누군가를 대리한 시간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여기 시골에서 그 누구도 대리하지 않고, 대리할 수도 없는 노동의 종말을 보는 듯해 슬프기도 하다. 


시골의 노동은 '대리올로기'에서 자유롭다. 내년 봄, 내가 다시 모암댁 엄니의 녹차밭에서 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녹차잎 따기, 내겐 허리 끊어지는 노동이었다. 모암댁 엄니는 내년에 녹차잎 따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대리 노동을 할 사람이 없어 다람쥐, 고라니가 포식을 했다는 엄니의 밭에는 지금 찬 겨울바람이 한가득이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대리할 수 없는 노동... '놉'을 아십니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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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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