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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29. 2016

부동산 투어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어느 나른한 오후,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복덕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나이 지긋한 중개인이 나를 맞아준다. 그는 많은 사람과 공간을 다뤄왔기에 삶의 지혜로 충만한 사람이다. 


우리는 낡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뽀얗게 김이 솟는 차를 마시며 살가운 대화를 나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공간에 대해 수줍게, 하지만 확실하게 설명하고, 중개인은 나의 의사를 충분히 이해한다. 긴 대화 끝에 나는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조아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그의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 달뜬 중개인의 목소리 “아가씨에게 딱 어울릴 만한 집이 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날 위해 운명처럼 준비된 그 집을 계약하고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부동산에서 한 번이라도 집을 구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이런 낭만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백일몽인지 단박에 알았을 것이다. 나는 위에 줄줄 늘어놓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어느 오후 부동산을 찾았다. 손때 묻은 나무 테이블이나 인생의 지혜를 통달한 것 같은 늙수그레한 부동산 아저씨는 없었고, 우리 회사 사무실과 똑 닮은 사무용 가구들과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컴퓨터 사이에서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저…… 집…… 구하려는데…… 전세로……."
"얼마짜리로요?"


그가 나에게 물어본 건 그게 전부였다. 그는 나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약 5분 후 남자 중개인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재킷을 떨쳐입으며 "그럼 가봅시다!" 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와 나의 매물 투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동산은 그저 의뢰인과 나온 매물을 매칭시켜줄 뿐이고 거기엔 오직 금액만이 변수였다. 


집을 본다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나는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답게 집을 고를 때 고려해야 할 체크리스트도 만들어둔 상태였다. 채광이니, 수압이니, 집 구조니, 관리비니, 체크해야 할 것을 A4용지에 빼곡히 작성해뒀다. 이 표를 손에 들고 매물로 나온 집의 곳곳을 다니며 속속들이 체크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진짜 사람이 살고 있는 남의 집에 들어가 감사 나온 공무원처럼 체크해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의 냄새가 자욱한 그 공간에 저벅저벅 침입해 수돗물도 틀어보고, 변기 물도 내려보고, 창문도 열어보고, 벽도 두드려보고, 장판도 쓸어보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임에도 낯설고 어색했다.


마음에 차는 집은 영 나타나지 않았다. 위치, 안전, 채광, 단열, 수압, 구조 등등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집은 내 예산 안에 없었다. 돈을 더 쓰면 햇빛이 몇 룩스 더 들어오고, 돈을 더 쓰면 집이 몇 평 더 넓고, 돈을 더 쓰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돈에 따라 결정되는 삶의 질이라니! 너무도 당연한 논리인지라 이제 알아챈 게 우스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껏 살며 내가 금액에 따라 골라왔던 건 집에 비해선 하찮은 품목들이었다. 


어쩌면 세상에 나를 위한 집 따위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날로 울적해졌다.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면 서울엔 건물이 빼곡하고 창문마다 빛이 훤한데, 저 많은 집들 가운데 내 몸 하나 깃들 곳이 없다니 암담해졌다. "거봐라! 세상에 우리집만큼 좋은 데가 어디 있다고!" 하는 엄마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  본 칼럼은 책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부동산 투어]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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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홍인혜(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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