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들은 아무리 장소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날,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많이 걸었다.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걷지 않을 때는, 잠시 어딘가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유년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다섯 살 무렵의 기억에서 시작되었고, 사라진 엄마를 찾아 동네 사람들을 붙잡고 일일이 엄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기억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햇볕이 얼굴에 닿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직감 같은 거 있잖아요. 나중에 둘째이모에게 들어서 알게 됐는데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사람들이 낳지 말라고 했대요. 아이는 언제든 가질 수 있으니까, 지금은 아이를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이 먼저라고 얘기한 건 아빠였고."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생일 선물이라고 하면서 국어사전을 사줬어요. 민중서림에서 나온 에센스 국어사전이었는데 아주 두꺼웠어요. 그때 들었던 생각이 아…… 이제부터는 모르는 게 있으면 이 사전을 들춰봐야겠구나. 그때부터 늘 사전을 손에 들고 다녔어요. 엄마한테 내가 뭘 물어봤는데, 대답할 수 없으면 엄마가 많이 창피해할 테니까."
나는 그가 한손에 들고 있던 책을 떠올렸다.
"난 엄마가 영어를 하는지 못 하는지 몰라요. 알파벳은 읽을 수 있는지, 간단한 영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해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아마 평생 못 물어볼 거예요. 그 친구랑 헤어질 때도 그랬어요."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방을 멘 듯 왼쪽 어깨를 내려뜨리고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붉고 노란 낙엽들이 공중으로 부유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실려 천천히, 아주 멀리까지 날아갔다. 물기 없이 버석거리는 낙엽이 내 발밑에 떨어졌다. 부유하는 낙엽들과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벚꽃이 피고 지는 봄처럼 명백하게 아름다운 가을의 절정이었다.
그는 정확히 그 가을의 가장 가장자리 쪽에 서 있었다. 커다란 단풍나무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점점 더 아름다운 쪽을 향해 구부러지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가 단풍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았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가을 끝의 단풍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내게 늘 요란스럽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름답지만, 소음으로 가득 찬 아름다움이었다.
계절을 지나는 동안 녹색이었던 잎 전부를 노랗거나 붉게 만드는 나무의 기능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해충에 대한 '경고'라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본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곤충 다큐멘터리에서였다. 단풍이 진딧물 같은 곤충을 향해, 겨울을 나는 자신의 경계 태세가 얼마나 철저한지 온몸으로 알리는 나무의 용맹정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탈피하고, 몸 전체의 색을 바꾸는 행위에는 엄청난 신체적 비용이 따른다. 그러므로 또렷한 가을빛을 내는 나무는 주위 그 어떤 것들보다 가장 건강한 나무다.
그렇게 나무의 겨울나기는 먹을 것을 극한까지 비축해 견디는 동물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나무는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버리는 것으로, 길고 혹독한 겨울 준비를 마친다. 축적은 나무의 생존 방식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무의 절정'이라 고 말하는 단풍의 붉은 빛은 '나를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는 메시지를 피로 쓴 혈서에 가깝다. 나는 단풍의 화학작용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기꺼이 버릴 수 있다면 비통함은 극한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비극이 아름답다면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잘 가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만히 속삭였다.
그가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버림받을 뻔한 아이가 버림받지 않기 위해 보냈을 어떤 시간을 짐작했다. 자기 안의 많은 것들을 버려야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외로움의 흑점 말이다. 그 시간을 지나버리고 나면, 삶의 어느 지점에 들어서도 더 이상 이보다 더 외롭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시간. 버림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먼저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돌연한 어른의 시간을……. 비가 내리면 떨어진 단풍은 하수구로 모여 들어 뉴욕의 옛 길들을 진창으로 만들 것이다. 물에 불어 바닥에 들러붙은 쓸모없는 낙엽을 치우기 위해 짜증 섞인 청소부들의 빗자루는 조금 더 바빠질 것이다. 아름다움은 마지막엔 이토록 처참하게 무용한 것이기도 하다.
"조성주."
나는 천천히 걷고 있는 그의 등 뒤로, 그의 엄마가 지어주었을 그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춘 채 우두커니 나를 바라볼 때까지. 여전히 바람이 불었다. 흩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반듯한 이마를 덮었다. 그가 오른쪽 손을 내밀어 천천히 흔들었다. 그는 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의 얼굴엔 감정을 한 번도 표현해본 적 없는 사람들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무표정.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무표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표정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넘쳐야 비로소 비워진다. 무표정은 감정들이 넘쳐 비로소 비워진 얼굴의 단면이다. 그것은 말로 말하거나, 몸짓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어느새 사라진 외로움의 측면 같은 것이다. 그가 반대편에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웃지 않는 아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어느 날의 가을 풍경이 떠올랐다. 그가 점점 멀어질수록 왼쪽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그것을 묻지 못했다.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거죠?"
나는 분명히
그의 편지에 답장을 쓰지 않았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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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